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정의의 사람들”, 책세상, 2000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은 1949년 12월 초연되었다. 이 연극은 독재자 세르게이 대공을 폭탄 테러하려는 러시아의 젊은 사회주의 혁명당원들의 이야기다. ‘야네크’라 불리는 주인공 이반 칼리아예프는 몇 달의 준비 끝에 마침내 대공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질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뜻하지 않은 상황으로 그만 테러에 실패한다. 마차에 대공의 어린 조카와 조카딸이 함께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사랑한 동료 도라는 ‘만약 폭탄에 어린애들이 산산조각 났다면 우리의 혁명은 인류 전체에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며 야네크의 행위를 옹호한다. 그러나 또 다른 동료인 스테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아이들이야! 입만 벌리면 그 이야기뿐이군. 내 말을 그렇게도 못 알아듣나? 야네크가 그 두 아이를 죽이지 않음으로써 수천 명의 러시아 어린이들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두고두고 굶주려 죽을 텐데. 너희는 어린애들이 배고파서 죽는 모습을 본 적 있어? 나는 봤어. 그런 죽음에 비한다면 폭탄에 맞아 죽는 것은 차라리 감사해야 할 일이지. 그러나 야네크는 그런 아이들을 보지 못했어. 그저 대공의 재롱둥이 강아지 새끼 두 마리밖에는 본 게 없다는 말야. 그러고도 자네들이 과연 인간인가? 그저 그 순간만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자선사업이나 하고 그날의 고통이나 덜어 주는 일이나 하는 것이 나을 거야.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고난을 뿌리째 뽑고자 하는 혁명은 아예 그만두란 말야.”

어리석은 감상 때문에 러시아의 다른 수많은 어린이들의 고통을 연장시켰다는 스테판의 비난과 미래 세대를 운운하는 동료들의 논쟁이 이어지자 야네크도 소리치듯 말한다.

“다른 인간들.... 좋아! 그러나 나는 나와 같이 이 순간 이 땅위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거야. 나는 바로 그들을 위해서 투쟁하고,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려는 거야. 내가 확신할 수도 없는 먼 미래의 세상을 위해서 지금 내 형제들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후려치지는 않겠어. 죽은 정의를 위해서 산 불의를 더 보탤 수는 없단 말야.... 어린애들을 죽이는 건 명예에 어긋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만약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어느 날 혁명이 명예와 갈라지게 된다면 나는 혁명을 버리겠소.”

그러나 스테판은 다시 “명예란 화려한 마차를 소유하고 있는 족속들만이 누리는 사치일 뿐이야”라며 간단하게 그의 주장을 내친다.

▲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정의의 사람들”, 책세상, 2000
둘의 불꽃 튀는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야네크는 “나는 인생을 사랑하기에 혁명에 뛰어든거야.”라고 말하는 낭만적 이상주의자고, 스테판은 “나는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 그보다는 정의를 사랑해. 그건 인생 이상의 거야”라고 말하는 초월적 이상주의자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이 땅에 단 한 사람이라도 억압당하고 있는 한, (어느 한 개인의) 자유란 감옥일 뿐”이라 믿는, 지독한 염결성을 가진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카뮈는 이 섬세한 살인자들 중, 그 어느 한편에 서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양자의 논리와 정당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그 누구도 쉽게 어느 한편을 지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도라는 경계에 선 작가의 고민을 대신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테러가 “삶을 위한 혁명, 삶에 기회를 주는 혁명”이 될 거라 힘주어 말하는 야네크에게 조용히 말한다. “그럼 알지....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사람을 죽이려는 건데.” 도라는 끝까지 야네크를 지지하고 그를 돕는, 그녀 역시 급진적 테러리스트이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의 행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되묻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들이 희구하는 신념과 이념 안에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삶의 구체성을 함부로 매몰시키지 않는다. “눈 깜짝할 순간이지만, 폭탄을 던지기 전 너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거야.... 어쩌면 그는 동정에 가득 찬 눈매로 바라볼지도 몰라.” 그녀는 야네크에게 그가 말하는 그 찬란한 혁명의 순간에 그의 눈에 무엇이 들어올지를 생각해 보라 말한다. 도라의 이런 목소리는 때로 다른 등장인물을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시가지 위로 어둠이 스며들 때 뜨거운 수프와 아이들, 그리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아내에게로 돌아가려고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틈에 끼여, 팔 끝에 폭탄의 무게를 느끼며 말없이 꼼짝도 않고 서 있는 것, 그리고 이제 3분, 2분, 몇 초만 있으면, 번쩍거리며 달려드는 마차 앞으로 뛰쳐나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테러거든요.”

이같은 도라의 신념은 “파괴의 행위에도 어떤 질서가 있고 한계가 있는 법이야”라는 그녀 자신의 외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파괴에도 어떤 질서와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언뜻 너무나 지당한 말이어서, 어떤 의미에선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스테판이 본 이 세계의 거대한 비참 앞에서, 야네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삶을 위한 열정을 간직한 이들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은 이처럼 어설픈 휴머니즘이 아닌, 스테판과 야네크, 이 두 대등한 정신의 긴장과 대립을 통해 정의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구현되는가라는 주제를 치열하고 밀도 있게 파고든다. 그리고 거기에 개입되는 도라의 고민과 질문은 최대한 그것이 공허하거나 추상적인 것에 빠지지 않도록 이끈다.

3막에 이르면 다시 기회를 얻은 야네크가 마침내 대공의 마차에 폭탄을 던져 그를 살해하는 데 성공한다. 그 결과 야네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사형이 선고된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 죽은 대공의 부인이 그를 면회한다. 신실한 종교인이었던 그녀는 야네크에게 황제에게 그의 사면을 부탁할 것이라 말한다. 야네크는 그것을 완강히 거부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타인이 생명을 빼앗은, 명백한 살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또 하나의 단계를 완성해야 했다. 그건 바로 그 자신의 죽음이다. 이미 그는 떠나기 전 도라에게 말했다.

“이념을 위해 죽는 것. 그것만이 이념의 눈높이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것만이 나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어.”

야네크는 자신이 빼앗은 생명에 대해 스스로의 생명으로 대가를 치름으로써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애원하듯 “살아야 해요. 살아서 살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라고 말하는 대공비의 자비어린(?) 청원을 단박에 거부한 것이다. 이 지독한 신념윤리 혹은 지불방식.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카뮈 역시 그에 대해선 명확히 이야기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이 세계의 비참과 불행은 그 때문이 아니다. 후에 그는 자신의 작품, “정의의 사람들”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다만 행동 그 자체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행동. 만약에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는 적어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행동만이 선하고 올바른 행동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까닭은 바로 그 세계가 그와 같은 한계를 넘어설 권리를, 그중에서도 특히 자기 자신을 그 대가로 바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죽일 권리를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수첩”에는 이렇게 적기도 했다. “생명으로 생명을 갚는다. 이 논리는 잘못된 것이지만 존중할 만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것이 아니라 위임에 의한 살인이다.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없다.”

모럴리스트인 카뮈는 어떤 일에도 한계가 있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 그 자체를 무조건 죄악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고통스럽게 넘어서는 이들을 향한 연민과 인간애를 그는 잃지 않았다. 대신 카뮈는 그 옹호의 한계를, 신념이 아니라 ‘책임윤리’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지불할 정도로 엄격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카뮈에게 정의는 그 신념의 내용이나 크기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얼마나 책임질 수 있느냐하는 그 책임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정의의 사람이란 “정확히 이념과 같은 눈높이에서 살며, 결국 죽음에 이를 정도로 그 이념을 몸으로 살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들이다.

“공산주의를 비롯해서 대의를 주장하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갖는 최악의 문제는, 너무나 고결한 나머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희생까지도 정당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지적은 그르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에 대해서는 적당한 기대감을 갖는 사람만이 끔찍한 해악을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는 지적도 그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원대한 희망과 절대적인 열정이 없다면 인간이 인간 본래의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런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몇 년 전에 타계한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고백이다. 아마 이 시대의 어른들, 지식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는 “성찰”일 것이다. 시대가 혼탁할수록 불의가 횡행할수록 그들은 성찰을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르지 않다. 하지만 성찰이 성찰만을 살며 스스로를 정당화할 때 그것은 문학평론가 조영일의 표현대로 “러닝머신 위의” 성찰이다. 그들은 열심히 반성하고 사유하지만, 결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에게는 ‘급진적이다’ ‘거칠다’ 또는 ‘시기상조’라는 말로 먼저 자신을 뒤돌아 보라며 짐짓 점잖게 권고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스테판의 분노도, 야네크의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도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성찰이라는 세련돼 보이는 우아한 허울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성찰은 윤리적일지는 몰라도 정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진리는 객관성이 아니라 정의를 향한 의지다.”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에서 한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이 진리인지 잘 알지 못한다. 진리는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진리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모든 것이 불확실할 때, 특히나 오늘날처럼 그것이 극단화된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가 아니라 행동하는 자신이다.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정의는 그 말처럼 그렇게 멋있게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 입고 어딘가 조금씩 깨친 채, 때론 볼품없이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에게 왔던 가장 큰 정의의 사람, 예수의 모습 역시 그러했다. 리 호이나키의 책 제목처럼 정의의 길은 언제나 비틀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믿는 것은 행해져야 한다. 우리의 존재가 불완전한 것이어도 괜찮다. 정의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책임을 통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전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윤수(토마스)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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