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멜라 드러커맨, "프랑스 아이처럼", 북하이브, 2013

육아. 사람이 사람을 기른다는 것.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인류의 공통사이며,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유지해 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육아는 하나의 기술인 동시에 노동이고 또 문화다. 그러므로 그것이 지속되어 온 긴 시간을 염두에 둘 때, 육아는 각 시대별 또 지역별로 어떤 유구한 전통을 만들어 왔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사회의 육아는 어떤가? 어떤 가치와 방법을 중시하며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가. 이 글을 쓰는 나는 올해 나이가 마흔이고, 19개월 된 아들 하나를 두고 있지만, 도무지 그럴듯한 답을 떠올리기가 힘들다. 나 스스로가 육아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잃어버린 육아 주도권

왜 우리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를 돌보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적절히 제공해 주는 훈련을 받지 못한 것일까.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커리큘럼 없이도 체득되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내 생각에 육아는 이미 그 주도권이 가정에서 시장으로 넘어 간 지 오래다. 육아의 많은 부분이 아웃소싱 되었으며, 그에 따라 부가되는 많은 것들이 소위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키워져 커다란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공교육 체제에 편입되는 순간, 그와 동시에 거대한 사교육 시장에 내맡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일찍 우리는 육아라는 시장에 포섭된다. ‘베이비페어’(babyfair)라 불리는 임신, 육아 박람회와 아이의 월령에 따라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구매를 강요받게 되는 각종 교구와 교재들까지. 육아의 모든 건 돈으로 귀결된다. 많은 젊은 부부들이 출산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우리사회의 고용과 노동환경 때문이긴 하지만, 결국 넓게 보면 출산과 육아가 스스로 주도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구조, 즉 시장에 지배되는 돈의 문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이 책을 대했을 때 마뜩치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이 책이 ‘북유럽식 교육’이니 ‘독일식 교육’이니, 철마다 유행을 바꿔 가며 나오는 출판시장의 또 하나의 기획 상품처럼 생각됐다. 하지만 “아이 키우기”(Bring up bébé)라는 원제를 “프랑스 아이처럼”으로 바꾼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이 뻔해 보이긴 했지만, 이 책은 그렇고 그런 육아 정보서나 프랑스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기대 한국 부모들의 허영심을 채워 주기 위한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미국인인 저자 패멀라 드러커맨(Pamela Druckerman)이 영국인인 남편 사이먼과 프랑스 파리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며 ‘외국인’으로서 독특한(?) 프랑스의 육아문화를 탐구하고 실천해 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육아에 관한 책이긴 하지만, "프랑스 아이처럼"은 프랑스 사회의 전통과 가치가 육아와 그 시스템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 그리고 우리와 달리 아직까지 그것을 시장에 빼앗기지 않은 프랑스인들의 건강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일종의 사회학적 보고서다.

프랑스 육아의 마법

▲ 파멜라 드러커맨, "프랑스 아이처럼", 북하이브, 2013.
먼저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미국식 육아법에 길들여져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거의 모든 육아의 기초상식과 그 방법들은 대부분 ‘미국식’이다. 그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뜨악해하거나 낯설어하는 많은 프랑스 육아의 풍경들은 우리에게도 역시 그렇게 다가온다. 예컨대 저자가 얘기하듯 미국에서는 (그리고 한국에서도) 아이들을 데리고 외식을 하거나 휴가를 떠난 다는 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다. 버스나 기차 안에서 쉴 새 없이 울어대는 아이들과 식당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어린 아이가 부모와 함께 휴가를 떠나거나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게 결코 위험과 난처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이 책에 따르면, 프랑스 아이들은 생후 18개월만 돼도 식당에 조용히 앉아 저마다 자기 앞의 코스 요리를 즐긴다. 심지어는 생후 4개월만 지나면 밤에 깨지 않고 내리 12시간을 잔다.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아이를 키워 본 사람들은 누구나 안다.

프랑스 육아의 핵심, ‘좌절’과 ‘분별력’

프랑스 아이들이 미국이나 한국의 아이들과 다른 것은 당연히 그들이 다른 교육을 받으며, 다른 사회문화 속에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 이 책을 ‘아이를 쉽게 키우는 101가지 방법’과 같은 몇 가지 육아의 팁을 얻으려는 실용서로 읽어서는 안 된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키워드는 ‘좌절’과 ‘분별력’이다. 앞의 것은 아이들에게, 그리고 뒤의 것은 부모들에게 요구되는 프랑스식 육아의 중요한 덕목이다. 프랑스에서는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좌절’을 가르친다. 쉽게 말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분명한 한계선을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알려 주는 것이다. 당연히 칭찬은 지나치리만큼 인색하다. “잘 했어”라는 말 대신 가장 빈도 높게 쓰이는 말은 바로 “아탕”(attend)이다. 아탕은 “기다려”, “멈춰”라는 명령어로 부모들은 이 단어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너의 욕구는 곧바로 충족되지 않으며 또 세상은 그럴 수도 없는 곳이라는 걸 가르친다.

이 책에 따르면 프랑스의 초, 중등 교육에서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창의력’이 아니라 ‘논리’다. 아무도 아이들의 말도 안 되는 말과 행동을 격려하거나 내버려 두지 않는다. 피아제의 ‘발달이론’을 금과옥조로 삼아,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게”와 같은 올림픽 정신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건, 어쩌면 전 세계에서 미국과 한국뿐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는 발달 대신 ‘발견’을 중시한다. 모든 육아의 시간은 아이들이 이 세계, 곧 물질과 정신의 영역 그 모든 것에 존재하는 것들을 스스로 발견할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그 이상은 모두 불필요한 것들이 된다. 프랑스인들이 칭찬하길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칭찬이 아이들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의존적인 성향의 사람으로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잘 했을 때, 그것은 누구가의 인정 없이도 스스로 기분 좋아할 일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인간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 내면의 기쁨과 행복을 찾아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그리하여 진정 생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 그것이 프랑스 사람들이 생각하는 육아와 교육의 목표이다.

멋지지 않은가. 나는 그것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나는 나”(I am who I am)라고 설명한 하느님의 존재방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탈출 3,14) ‘나는 오직 나로써 나다. 나는 나 이외의 다른 그 무엇으로도 증명되거나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게 프랑스 사람들은 완전히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내면을 가진 인간을 키워 내려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부분에서 프랑스의 육아법과 그 철학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이 책에서 나를 가장 오래 붙들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단어는 ‘분별력’이었다. 우리는 아이를 키우면서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하고, 또 또래의 부모들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 등을 찾아 갖가지 정보들을 얻는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양하고, 정보라는 것들도 넘쳐날 정도로 많아 그 안에서 갈피를 잡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들이란 것도 대부분 시장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로 심하게 말하자면, ‘어느 회사의 물건이 좋은가요?’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프랑스의 부모들은 시장의 정보에 휘둘리지 않는다.

프랑스에도 양육 관련 책이나 잡지, 웹사이트들이 많지만 꼭 읽어야 한다는 인식도 없고 다량으로 구입하는 사람도 없는 듯했다. 양육 철학을 비교, 선택하는 이도, 학자 이름이나 기법을 들먹이는 이도 만나 본 적이 없다. 필독 신간도 없었고, 부모들이 맹신하는 전문가도 없었다.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그런 책들이 도움이 되겠지만, 책만 읽고 아이를 키울 수 있나요? 자기 느낌대로 하는 거죠.” 파리의 한 엄마는 말했다.(41쪽)

책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굴을 좋아하는 임산부가 산부인과를 찾아가, 굴이 먹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물었다. 알다시피 한국의 임산부들은 절대 날 것을 먹지 않는다. 그 외 많은 금기들이 있고 그것들을 얼마나 잘 지키고 참아내느냐에 따라 자신이 좋은 엄마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재곤한다. 그러나 그 질문을 받은 프랑스 의사의 대답은 이랬다. “그럼 굴을 드세요! 당신은 합리적인 사람인 것 같으니까. 뭐든 잘 씻어서 먹는 것만 잊지 마세요. 초밥이 먹고 싶으면 좋은 곳에서 드세요.”(43쪽)

어른이 아이를 키운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중요한 것은 ‘뭐든 허용된다’는 것이 아니라 ‘침착하고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침착과 분별력은 어른들의 몫이다. 프랑스인들이 아이들을 자신의 소유로 보지 않고, 그저 작고 어린 한 ‘인간’으로 보는 건, 다시 말해 아직 보호가 필요하지만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대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부모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어른임을 잘 알고 또 사회에서도 그렇게 대우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아이에게 돌려주는 것일 뿐이다. 저자는 다소 엉뚱한 데서 프랑스 사회의 매력을 찾는데, 그것은 파리에서는 전동차가 멈추기도 전에 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이렇게 평가한다. “이 도시가 시민들을 어른으로 대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라고. 사소한 거 같지만 나 역시 그 대목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한국사회는 정작 챙겨할 중요한 사회적 안전은 하나도 챙기지 못하면서 ‘안전’이라는 명목으로 일상의 소소한 부분들을 관리하고 통제한다. 초등학생들도 아닌데, 공공장소에는 어디에나 ‘나가는 문’, ‘들어오는 문’, ‘우측통행’ 등을 강요하는 표식들을 붙여 놓고, 화장실에서 조차 식상한 명언들을 붙여 놔, 수시로 사람들을 가르치려 든다. 도시 도처에 계몽과 훈육이 넘쳐 난다. 그리고 한적한 도로에 차 한 대 지나가지 않아도 빨간불이면 영락없이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걸 마치 대단한 시민의식인 양 치켜세운다. 이건 단순히 편의와 질서를 위한 것을 넘어선다.

결국은 국가가 국민들을 어른이 아닌, 애들로 밖에 보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육아란 어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평생을 애처럼 대우 받아 온 어른 아닌 어른들이, 분별력을 갖고 자신이 아이들을 키워 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어 부모가 되면, 이리저리 전문가와 정보들을 찾아 헤매고 그 틈을 자본이 비집고 들어와 결국은 무기력하게 부모로서의 거의 모든 결정권들을 시장에 의지 또는 헌납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교훈은 프랑스식 육아법의 우수함이 아니라, 육아는 분별력 있는 어른들의 일이며,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는 사회 속에서 진정한 육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되고 주변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많은 이야기들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아이는 부모를 닮는다.’는 거였다. 흔히 누구나 말하고 또 듣는 말이지만, 이 말의 의미는 좀 더 깊고 무겁게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어른이 아닌 사람이 어른을 키워 낼 수는 없는 일이다. 어른 부모가 아닌 시장에 내 맡겨진 육아는 우리의 아이들을 시장에 잘 팔리는 상품으로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내 맡겨진 아이의 부모들은 이미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으로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무서운 일이다.

내 아이의 이름은 ‘담’(澹)이다. 담담하게, 맑게, 소박하게 살라는 뜻으로 내가 지어 주었다.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내 내면의 모습이었고, 지금껏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내 아이만큼은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이름이다. 19개월 차 부모가 되어 요즘 나는 내 아이의 이름을 자주 마음에 새긴다. 결국 내가 그렇게 살아야 내 아이도 그렇게 살게 되겠구나, 내가 그런 어른이 돼야만 내 아이도 그런 어른이 되겠구나 싶은 것이다. 육아가 어려운 것은 그것이 부모인 나를 키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만큼으로 부모도 자라야 한다. 결국 육아란 부모가 먼저 사는 아이의 시간이고 삶이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고윤수(토마스)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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