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금요일엔 돌아오렴", 창비, 2015

이야기 하나 :
오래전 일이다. 직장 사무실 근처에서 큰 불이 났다. 내가 근무하던 곳이 12층이었는데, 창밖으로 거대한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한 200미터쯤 떨어졌을까. 한눈에 큰 화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직원들이 창가에 몰려들어 연기 나는 쪽을 바라보며, ‘어딘 거 같다’, ‘아니다, 어디다’ 수군거렸다. 한참을 그러다 12시가 되자 모두들 구내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내려갔다. 점심시간에는 늘 엘리베이터가 만원이라 비상계단을 통해 1층까지 걸어 내려갔는데, 나도 그 좁은 통로를 쓸려 내려갔다. 내려가며 생각했다.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누군간 불길에 갇혀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린 또 이렇게 한 끼 배를 채우러 가는구나.” 문득 이런 상황 자체가 부조리 혹은 부당하다고 느꼈다.

이야기 둘 :
급성간염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응급실에 있다가 6인 병실로 옮겼는데, 내 옆에 간암 말기 환자분이 누워 계셨다. 가망이 없어 별다른 치료도 없이 계속 강한 진통제만 맞고 계셨다. 보통 그런 분들은 1인실로 옮겨 때(?)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그분은 병실이 없어 아직 가지 못하고 있었다. 고통이 극심했는지 밤새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옆에서 한 생명이 사그라지고 있다.’는 것을. 병상을 지키시던 부인은 아침마다 내게 밤새 못자지 않았느냐 물으며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괜찮다’ 말씀드렸다. 나는 왠지 그런 대화가 어색했다. 죽어가는 고통과 숙면의 불편은 서로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것이었다. 며칠 뒤 새벽에 그분은 내 옆에서 돌아가셨다. 영안실로 옮겨지고 아침에 병상을 정리하며 부인은 내게 ‘미안하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다시 고개를 숙이셨다. 얼굴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끝날 일이 끝났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냥 모든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은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에서 쓴 세월호 유가족 13명의 인터뷰집이다. 이 책은 사랑하는 자식들이 탄 배가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리하여 그들을 영원히 잃어버린 부모들의 슬픔과 고통, 견딤(극복이 아니라)에 관한 기록이다. 많은 이들이 그럴 테지만, 이 책을 읽기란 쉽지 않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자주 얼굴이 일그러지고, 북받쳐 오는 감정 때문에 참으려 해도 눈물이 터져 나온다. 이 책은 슬픔과 고통에 관한 기록이며, 기록 자체가 슬픔과 고통이기도 하다.

유족의 고통은 이렇다

▲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금요일엔 돌아오렴", 창비, 2015.ⓒ창비
이처럼 이 책은 분명한 고통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아무리 명징한 것이라 해도 감정이란 그렇게 명료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를테면 정말 큰 슬픔은 그 고통이 마치 지진의 여파처럼 조금 뒤에 온다. 내가 접한 가장 고통스러운 대목은 딸의 죽음을 확인하고, 어렵게 그 죽음을 받아들였으나, 정작 그렇게 슬픔을 추스르고 돌아갈 그 일상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오열하는 아버지의 울음이었다.

승희를 (안산병원 영안실) 냉동고에 안치하고 다음날 장례식 치를 준비를 해야 해서 집으로 가려는데, 우리가 진도 내려갈 때 차를 단원고 옆에다 주차하고 갔었거든요. 차를 탔는데 승희 아빠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는 거예요. 매일 넷이 타다가 셋이 탄 그 느낌,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 2학년 3반 신승희 학생의 어머니 전민주 씨 이야기 중

타인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엄청난 고통 앞에선 오히려 감정이입이 힘들다. 그만한 경험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유가족들 또한 세월호 이후 감정의 퓨즈가 다 끊어진 상태를 경험하기도 한다.

감정을 느낄 수가 없어요. 누가 아프거나 다쳤다고 하면 마음이 아파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멍해요. 그러고 조금 뒤로 물러나서 생각하면 ‘아, 이건 아픈 거구나. 아파해야 하는 거구나’라고 머리로 생각하고 그제서야 감정을 개입시키더라고요. 얼마 전 저희 성당 자매분이 교통사고가 났어요. 다행히 많이 안 다쳤지만, 사고가 크게 났거든요. 그 얘기를 듣고 놀라야 하는데, 놀라는 게 아니야. 그 상황이 그냥 언어로서 내 귀에 들어오지 감정으로 전달이 안 돼요. ‘어머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서 하나하나씩 단계를 밟듯이 감정을 느끼는 거예요.  - 2학년 2반 길채원 학생의 어머니 허영무 씨 이야기

슬프게도 우린 한번도 타인이 되어 볼 수 없다. ‘나’는 ‘남’이 될 수 없다. 그게 우리 실존의 한계다.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말한 것처럼 감정이란 그 자체로 고스란히 소통되거나 공유되기 어려운 법이므로 그 모든 느낌들이 저마다 소중하고 또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엮은 작가들은 고통스러운 작업 속에서도 유가족들에게서 희망의 단서를 찾아냈다. 나 역시 그것을 느꼈고, 그것이 놀랍고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우리가 포기한 어떤 지점들을 부모들은 그대로 뛰어 넘었다. 부모들은 예단하지도 속단하지도 않으면서 유연하게 세상과 마주하고 있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릎도 꿇었다. 고통 앞에 솔직했고 자신들의 바람 앞에 명확했다. 그리고 지혜롭고 현명했다. 부모들이 이 지혜와 현명함은 자식들을 위해 당신들의 온 마음을 낸 결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슬프면서도 존경스러웠다.... 부모들이 많이 아픈데 기록하는 우리가 아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인터뷰 내내 울다가 한 글자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많았다. 아픔을 견디는 부모들이 있었기에 우리도 견딜 수 있었다. 이 세상 포기하지 않고 살아도 좋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내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느꼈던 가장 큰 감정은 ‘분노’와 ‘수치심’이었다. 분노와 수치심은 공감에서 오는 감정이 아니다. 그건 온전히 내가 느끼는 나의 감정이다. 우린 4월 16일 8시에 조난 신고를 보내온 세월호가 11시에 완전히 침몰하기까지, 그리고 어쩌면 침몰 후에도 선실에 남아 새어 들어오는 바닷물을 담요로 틀어막으며 구조를 기다렸을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에게 어떠한 실질적 구조행위도 하지 못했다. 자력으로 배 밖으로 밀려나온 이들을 바다 위에서 건져 올렸을 뿐이다. 그것도 그 일을 해낸 건 대부분 작은 어선을 타고 달려온 인근 섬주민들이었다. 우리가 만들어 낸 이 거대한 국가의 시스템은 그날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억울함을 없게 하라

참사 이후에도 우리는 무능하고 잔인했다. 죽은 자를 애도하고 남겨진 자를 위로하는 것은 인류의 가장 오랜 공동체 윤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것을 배반했다. 오히려 죽은 이와 산 이를 모두 욕보이고 멸시했다. 나는 일찍이 내 세대에 이런 야만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이런 지독한 수치심은 416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조선시대 중국에서 들여와 사용한 법의학서의 이름이 “무원록(無寃錄)”이다. ‘무원’ 억울함을 없게 하라는 뜻이다. 죽음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며, 산 자의 책무를 무원이라 본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어떠한 보상도 거부한 채, 자신들의 아들과 딸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를 밝혀 달라는 단 하나의 요구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대의적인 요구를 이 사회에 전달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들어 주지 않았다.

참사의 당사자인 유가족들이 느껴야 할 감정이 슬픔이라면 유가족이 아닌 우리가 느껴야 할 가장 큰 감정은 수치심이어야 한다. 물론 유가족이 아니어도 느끼는 슬픔은 분명한 감정이며 그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슬픔이 혹 ‘연민’에서 온 것이라면, 더더욱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이 복잡한 감정의 실체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정직하게 응시해 내야 한다. 진은영 시인의 말대로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우리가 마음껏 가엾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 받는 이들의 상황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할 때뿐이다”(“눈먼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중)

과연 나는 사람으로 행세할 수 있나

오래전 읽은 이병주의 소설 “8월의 사상”의 한 구절을 잊지 못한다.

“먼 훗날/ 살아서 너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더라도/ 사람으로 행세할 생각은 말라/ 돼지를 배워 살을 찌우고/ 개를 배워 개처럼 짖어라”

이병주는 이 문장을 학도병으로 끌려간 중국 쑤저우 소재 일본군 60사단 수송부대에서 말(馬)을 시중들며 보초를 서는 도중에 적었다고 한다. 나는 이 문장에서 작가의 몸서리처지는 수치심, 도저한 모멸감을 느낀다. 416 참사 이후를 살아가는 나 역시 그렇다. 세월이 지나 참사의 전모가 조금씩 드러나고,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탑과 추모비가 세워지고, 지금의 피가 철철 흐르는 이 상처도 그저 흉터로 남게 될 그런 날이 오겠지만, 그 먼 훗날이 와도 이병주의 고백처럼 우리 결코 ‘사람으로 행세할 생각은 말자.’ 그렇게 억지로라도 다짐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의 선한 의도와 그 목적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이 책이 부디 우리의 슬픔을 연민이라는 이름으로 소비해 내는 목적으로 읽히지 않길 바란다. 대신 우리가 무엇을 부끄러워야 해야 할지를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유가족들이 감당해 내고 있는 상상하기 힘든 그 슬픔과 고통의 무게에 상응하는 우리의 수치심과 모멸감이 마주보는 추가 되어 그 둘이 균형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두 감정의 팽팽한 긴장으로 이 잔인한 세월을 건너가고 싶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누군가는 그럴듯하고 달콤한 말로 회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정의 감정을 벗어 버려서는 안 된다. “정의를 위해 물러서지 말라.” 세월호 희생자 김건우 군의 어머니 노선자 씨가 붙잡은 교황님의 말씀이다. 우리 또한 물러나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에 보내는 세월호의 조난 신호가 아직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늦기 전에 구해내야 한다.

고윤수(토마스)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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