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프랑스의 풍자신문 샤를리 에브도의 참극으로 촉발된 논쟁들이 아직도 뜨겁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폭넓게 회자되며 대립각을 만들어 온 주제는 표현의 자유에 관한 것이었죠. 즉,“이슬람인에 대한 샤를리 에브도의 조롱이 너무 지나쳤다” 는 의견과, “표현의 자유는 무조건 수호되어야 한다”는 의견 간의 대립입니다. 이 주제는 사실 샤를리 사건을 이해하는 데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 프레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샤를리 사건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외부 권력” (이슬람 근본주의) 의 침해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샤를리의 학살은 외부권력에 의해서가 아닌, 프랑스 사회에서 나고 자란 프랑스인들의 손으로 자행되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프랑스 사회 내에서 자신들이 겪은 좌절과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이슬람과는 상징적 관계를 가졌을 뿐인 이슬람 근본주의를 선택했지요. 겉으로 보기에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와 종교적 근본주의의 대립으로 보이지만, 실은 프랑스 사회 내의 불안과 정치경제적 갈등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근본주의는 테러리스트들이 선택한 무기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샤를리 에브도와 관련된 프랑스 사회의 문제를 토론할 만큼 오늘날 프랑스 사회에 대한 식견이 넓지는 않고요, 사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사건의 본질과는 큰 관련이 없음에도 뜨겁게 달아 올라 버린 바로 그 표현의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는가, 규제가 필요한가, 어디까지가 외압에 의한 자기 검열인가”와 같은 질문들이 제기되었고, 이 질문들은 여전히 토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할 때 걸림돌처럼 흔히 언급되는 것이 바로 가톨릭을 포함한 종교이기 때문이죠.

저는, 표현의 자유에는 어떠한 규제도 있을 수 없으며, 이를 규제하고 박탈하려는 폭력적 시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와 근본주의에 대항해 온 샤를리의 정신은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표현의 “한계”에 관해서는 자유/침해 프레임을 벗어나 신중하게 따져 보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 싶은데요, 바로 “웃음”에 관한 것입니다.

웃을 자유

웃음은 언제 터져 나올까요? 다양한 원인이 있겠습니다만, 대략 “친숙한 것”들의 “경계”를 벗어나는 상황을 보거나 겪을 때 폭발합니다. 웃음은 상극의 정서인 슬픔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슬픔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상실감에 근원을 두고 있기에 보편적이고 즉흥적이며 공감하기 쉽지요. 그러나 웃음은 상황에 대한 해석과 판단이 전제되어야만 웃을 수 있습니다. 즉, “친숙한 것”이 무엇인지, “경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화적 합의를 의식적으로든 잠재의식적으로든 알고 있어야만 웃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웃는다는 행위는 슬픔과는 달리 결코 보편적이지도, 즉흥적이지도, “쉽지도” 않습니다.

웃음에는 분명 저항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풍자와 해학은 예로부터 약자들이 가진 자들을 조롱해 왔던 수단이었기에, 가진 자들의 권력이 부당하면 부당할수록 웃음의 저항성은 커졌고, 웃음에 대한 통제 또한 정비례로 강화되었지요. 부끄러운 과거지만, 웃음에 대해 가장 예민하게 반응했던 권력은 종교권력이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웃음에 대한 중세교회의 태도를 잘 보여 주고 있지요. “장미의 이름”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의 원인은 희극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전해지는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입니다. 경건한 수도사들에게 경박한 웃음이란 결코 허락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근엄한 수도자 호르헤는 다른 수도사들이 이 책을 읽는 것을 막으려고 책의 오른쪽 모서리에 독약을 묻히죠. 누구든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면 독살이 되게끔 말입니다.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 버린 윌리엄 수사는 호르헤에게 묻습니다. “웃음이 왜 그렇게 두려운 것이냐” 고요. 호르헤는 답합니다.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이오. 두려움이 없다면 신앙도 있을 수 없소. 악마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하느님은 필요치 않을 테니까.” 에코의 소설적 상상력은 다분히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있습니다.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피억압의 구분이 확실하던 중세시대 종교권력은 공포와 권위를 기반으로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체제 아래서 웃음은 그 자체로 도발이었지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권력의 엄숙주의를 우스꽝스럽게 만들며 다른 세상을 향한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는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으니까요.

▲ <샤를리 에브도>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자유"라고 쓴 손 팻말을 들고 있다.(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웃지 말아달라고 할 권리

그러나 중세시대와는 달리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우리 시대에 웃음은 대단히 복잡한 의미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권력의 의미 또한 억압과 피억압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벗어나 미시적 관점으로 이해하게 되었지요. 중세시대의 왕권과 종교권력, 혹은 근현대 독재정권과 같이 저항해야 할 권력과 지배적인 가치관이 단일하고 명확하다면, 민중이 공감할 수 있는 웃음의 기호 또한 비교적 명확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시대는 그렇지 않죠. 웃음이 권위에 대한 도전이냐, 약자에 대한 조롱이냐를 구분할 수 있는 경계가 참으로 모호합니다. 우선, 어떤 사회냐에 따라 특정 가치관이 사회에 행사하는 영향력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를 예로 들자면,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과 같이 이슬람교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존재하며 여성과 성소수자를 비롯, 약자들의 인권을 심각한 수준으로 탄압하고 있는 곳에서 이슬람교에 대한 풍자는 권위에 대한 도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로 이민자들의 종교로 사회 변두리에 존재하는 서구 유럽과 북미에서 이슬람교에 대한 풍자는 그나마 자신의 신앙을 유일한 자존심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소수자들의 처지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 수 있지요. 웃음이 저항의 도구가 아닌 차별과 배제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항상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일들을 생각한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가치가 다양한 만큼, 익숙하지 않거나 동의할 수 없는 가치도 많습니다. 개개인의 성적 정체성, 교육 수준, 계급적, 사회적 위치와 정치적 입장, 문화적 취향이 모두 다르니 “친숙한 것”과 “경계”에 대한 감각 또한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죠.

웃음이 어떻게 원래의 의도와는 다른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 어떻게 차별과 배제의 수단이 될 수 있는지, 타향인 미국에 살고 있는 저는 자주 경험하곤 합니다. 가까운 예로, 바로 얼마 전 열렸던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 유명한 한국계 코미디언 마가렛 조가 등장해 이슈가 되었던 북한 소재의 영화 “인터뷰”를 빌미로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흉내 낸 일이 있었습니다. 시상식을 TV로 보고 있던 저는 마가렛 조의 연기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를 읽기도 전에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이튿날 미디어의 반응을 보니 저뿐 아니라 미국에 살고 있는 많은 동양계들이 불편해 했더군요) 백인들 일색인 시상식장에 혼자 나와, 동양인 특유의 찢어진 눈을 강조한 분장을 하고, 동양인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실룩 거리며, 한국인 억양이 두드러지는 어색한 영어를 구사하며, 문화적 몰상식을 보여 주는 민망한 실수를 의도적으로 남발하고 있는 마가렛 조가 저기서 백인들을 웃기고 있는 것인지, 백인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불쾌해하고 있는 제게 만약 어떤 미국인이 “그저 코미디일 뿐인데 무얼 그리 심각하게 반응하느냐,” “저 코미디는 인종차별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북한의 비인권 실태를 풍자한 것인데 왜 그걸 이해 못하느냐,” “미국인들의 외모와 행동을 소재로 삼는 코미디는 뭐라하지 않으면서 동양인을 소재로 삼는 것에는 왜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아마도 저는 “당신이 인종적 소수자가 되어 이 땅에서 살아간다면, 당신의 외모와 말과 행동을 조롱하는 코미디에 웃을 수 있겠느냐, 아무리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 동의할 수 있겠느냐”하고 반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생각만 하지, 질문을 한 상대와 웬만큼 든든한 신뢰 관계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면, 따라서 그가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할 겁니다. 인종적 소수자로 살아가면서 다수의 백인들에게 “웃지 말아 달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기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는 ‘웃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웃지 말아 달라고 요구할 권리’를 행사하고 싶은 저는 누구에게 그 부당함을 호소해야 할까요?

물론 미국땅에서 느끼는 인종차별과 샤를리 사건을 연결한다면, 샤를리 에브도를 인종차별, 반 이슬람주의자들로 매도하는 것이냐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저는 샤를리 에브도가 인종 차별과 반이슬람주의를 의도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만평이 본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인종차별과 이슬람인들에 대한 모욕으로 오인될 소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웃을 수 없는 이들에게 “왜 당신들은 웃지 못하느냐”, “만평에 담긴 깊은 뜻을 왜 이해 못하느냐” 따져 묻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도덕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지식인들의 오만인 것 같습니다. 또, 샤를리가 이슬람 근본주의뿐 아니라 가톨릭 보수주의도 함께 비웃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여파와 반응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기나긴 역사를 거치며 가톨릭의 부패와 도덕주의의 폐해를 경험해 온 프랑스에서 바티칸에 대한 풍자는 권위에 대한 도전일 수 있으나, 예언자 무함마드를 조롱거리로 삼는 것은 의지할 곳 없는 이민자들, 근본주의자가 아닌 대부분 이슬람인들에게도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법적인 강제 혹은 어떤 형태이든 외압을 통해 자유를 억압하려 한다면 검열은 심해지고, 대화는 사라지며, 공포와 불신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의 “한계”가 반드시 외압에 의한 자유의 “침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마음 가짐, 더욱이 표현할 권리가 없는 이들, 웃지 말아 달라고 할 권리조차 보호 받지 못하는 이들이 겪게 될 서럽고 난처한 상황을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은 자유의 침해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요. 표현의 “한계”를 설정하고 “자기 검열”을 해야 할 기준은 권력과 권위에 대한 눈치가 아니라, 약자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요. 실은 프랑스 사회보다도 우리 사회에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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