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드 제3차 임시 총회가 남긴 숙제

가정에 관한 시노드 제3차 임시 총회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중간 보고서 단계에서 큰 관심을 끌었던 동성애 관련 조항—“동성애자에게도 은사가 있으며, 이를 통해 교회에 헌신할 자격이 있다”—은 최종 보고서에 결국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큰 보폭의 변화를 기대했던 분들은 아마도 안타까워하셨을 터이고, 급작스런 변화를 우려했던 분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정체되어 왔던 문제들이 공론화되었다는 의미에서, 또 판단의 기준이 오로지 교회법이었던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일에 대한 사목적인 배려가 강조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번 시노드는 결과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특히 보고서 채택 과정을 유례 없이 투명하게 모두 공개함으로써 교종은 지역교회들에게, 우리 모두에게, 숙제를 남겼습니다. 논의를 촉발시켜 삶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적극적으로 듣고, 내년에 열릴 정기 총회에 반영하고자 하는 교종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벌써부터 교회 안팎에서 뜨겁게 논의가 재개되고 있습니다. 교종은 불길을 당겼고, 변화는 사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어떻게 방향을 잡을 것인가, 교종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 숙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제 생각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만, 동성애에 관한 신학적 논의와 관련한 성서구절과 전통 재해석은 오늘 잠시 접어 두겠습니다. 그보다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동성애 논의를 구성할 담론과, 논의를 진행시킬 공간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선 담론의 문제를 돌아볼까요. 교회에는, 특히 한국 교회에는 아직 동성애를 비롯 성(性)과 관련된 사안을 진지하고 성의 있게 토론할 수 있는 담론, 아니 그보다 언어 자체가 없습니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집이잖아요. 그런데 교회법에서 이해하고 표현하는 성은 재생산과 관련된 것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인간의 성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깊고 친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폭넓고 긍정적으로 인식하도록 돕는 적절한 단어들이 등장하지 않아요. 도덕적 기준에 가두어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한 언어 밖에 없지요. 성에 관한 인식은 수세기를 거쳐 변화해 왔는데, 언어는 아직도 중세에 머물러 있습니다. 인간의 몸과 영에 대한 통합적인 사고가 부족했고, 무엇이든 이분법적으로 나누기 익숙했던 시대의 언어로 동성애를 생각하고 말을 하자니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요.

미국의 신학자 마크 조던(Mark D. Jordan)은 가톨릭교회가 동성애를 언급하는 언어와 수사법에 대해 오랜 시간 관심을 기울여 온 신학자인데요, 그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내놓은 동성애 관련 문헌들을 분석한 글을 통해 “교회의 언어는 동성애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보다는 기존 교리에 대한 단순 반복, 위협, 명령, 근거 부족한 확신을 드러내는 논조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했습니다(Mark D. Jordan, ‘The Silence of Sodom: Homosexuality in Modern Catholicism’,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이러한 공격적인 언어들이 교도권과 결합하여 동성애 신자들의 신앙생활로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한 분노와 절망, 수치를 느끼다 결국 교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성적 지향을 숨긴 채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 자명합니다.

유럽과 북미 신학계는 1980년대부터 이미 교회의 언어들을 재고하고 동성애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각과 관점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에 비해 한국 교회는 동성애 논의의 근간이 되어야 할 언어에 대한 관심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우리 사회의 특수성과 변화를 반영하기보다 그저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입장을 반복하고 확인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요. 동성애 신자들을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본 경험이 우리에겐 아직 없다는 뜻입니다. 굳이 서구의 경향을 쫓아 가야할 까닭은 없지만, 우리 교회도 이제 과거의 사고틀과 언어로 성에 관한 논의를 지속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 동성애 커플 이야기를 다룬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2010)의 한 장면
새로운 언어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사자들의 삶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 합니다. 교종이 강조했던 것처럼, 성서와 전통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잣대처럼 들이댈 것이 아니라 관심과 포용이 우선되어야 하지요. 교회는 오래 전부터 동성애 신자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를 강조해 왔지만, 당사자들이 겪고 있는 삶의 정황에 대한 이해 없이 배려 운운한다는 것은 설사 좋은 의도를 품었다 하더라도 폭력입니다. “배려”를 가장한 폭력을 교회는 사실 숱하게 행사해 오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사목적 배려”를 동성애 신자들을 교정하려는 시도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접근 방식은 곤란합니다. 모든 배려의 원칙은 상호 이해의 공간을 넒혀 가는 것이지, “당신은 틀렸다”라고 단정하고 내 규범에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지요. 동성애 신자들을 배려하는 원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바로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동성애 신자들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겠지요. 그러나 한국 교회에는 그 공간이 없습니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점차 나아지고 있으며, 인권적 차원으로 동성애자들의 “다름”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아지지만, 한국 교회는 동성애에 대한 공적 담론 형성의 공간을 진지하게 마련했던 적이 —적어도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교회가 나서서 하지 못하는 민감한 주제들이 있다면 학교와 다양한 학술 공간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데, 평신도 신학자들을 위한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에겐 그 공간조차 없습니다.

당사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한 경험이 없으니 최소한의 인권 감수성조차 기대하기 힘듭니다. 혹, 개신교 우파의 끔찍한 동성애 혐오와 비교해 가톨릭은 그래도 “좀 낫다”라고 말씀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 2003년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차별금지법 제정이 자꾸 지연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개신교 우파들의 전방위적이고도 조직적인 동성애 반대투쟁 때문이지요. 이 과정에서 개신교 우파는 “종북 게이”라는 해괴한 단어까지 만들어 사회적 약자들을 정치적 위험 세력으로 몰아가는 전형적인 극우 정치의 행태를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개신교 우파들이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언어폭력을 퍼 부으며 동성애자들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 내는 동안 가톨릭교회는 무엇을 했을까요? 일관된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바로 침묵입니다.

침묵은 다양한 해석을 동반하지만, 동성애자들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침묵은 명확하고 단일한 의미를 드러냅니다. 바로 동성애자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입니다. 마치 교회 안에 동성애자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대응해 왔던 것이지요. 침묵을 통해 개신교 우파들의 동성애 혐오가 진리인 것처럼 유포되도록 암묵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교회의 침묵과 회피는 밖으로는 개신교 우파의 공공연한 인권 침탈과 폭력 행위에 힘을 불어 넣으며, 안으로는 무지와 무관심을 양산해 왔습니다.

“내 주변엔 동성애자가 아무도 없어요, 티비에서나 보지.” 이런 말 하는 신자 분들 아직도 가끔 봅니다. 마치 본인은 동성애 청정구역에서 산다는 듯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곤 하지요. 이런 분들 만나면 참 민망합니다. 자랑스러워 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 할 일이라고 넌지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은연중에 동성애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마구마구 발산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주변에 적지 않은 이들이 당신을 친구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뜻이라고, 자신들의 눈물을, 아픔을, 서러움을, 모욕스럽고 억울한 경험들을, 그리고 또 사랑을, 기쁨을, 행복을 함께 나눌 이웃으로 당신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 한숨이 나오는 것은 교회 전체가 바로 이런 분들처럼, 옆에 살되 이웃이 될 수 없는 집단으로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성애 신자들이 상처받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토로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과, 그들의 경험과 변화하는 시대 인식을 반영하는 새 언어를 구성하는 것이 제 생각에는 동성애에 관한 신학적, 성서적 판단 근거를 마련하는 것 보다 우선입니다. “글로 쓰인 단어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면, 우리는 인간의 삶을 통해 당신의 은총을 드러내시는 “놀라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교종의 시노드 폐회 연설 중에서) 이 두 가지 과제가 선행되기 위해서는 우선 동성애 신자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정죄와 비난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공동체의 삶 속에서 읽히도록 교회 안팎의 환경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이미 상처 받고 위축되어 있는 그들이 앞에 나서기 힘들 테니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먼저 내려놓고 다가가야 합니다. 모든 성원들의 의식이 한 순간에 바뀔 리 없을 테니 인내심을 갖고 그들을 격려하며, 편견에 함께 맞서며, 끝까지 그들의 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동성애 신자들은 교회의 “문제”도 아니고, 교정해야 할 “대상”도 아닙니다. 다른 모든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부이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눈 가족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람을 사랑할 때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랑해야하는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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