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성탄 대축일 다음 날 아침의 어색하고 민망함, 다들 느껴 보셨을 겁니다. 전례력으로는 주님세례축일까지 약 2주 동안을 성탄시기로 경축하지만, 아무래도 성탄의 감흥은 전야와 당일에 대단원을 이루고 그 이후로는 식어 가지요. 상업주의로 변질되어 버린 세간의 성탄 다음 날은 더 삭막합니다. 마치 ‘그날’을 위해 일년을 기다려 왔던 듯한 모든 것들이 날이 밝음과 동시에 ‘유통기한’을 넘겨 버리고 의미를 잃죠. 그렇게 달콤하게 들리던 캐럴들이 어느덧 식상해지고, 정성들여 장식했던 트리가 치우기도 귀찮은 애물단지가 되어 버립니다. 부모들의 일년 묵은 죄책감을 달래 주었던 산타와 사슴들이 하루 만에 계약을 만료 당한 채 창고에 처박히고, 백화점과 마트에는 성탄 선물을 반품, 교환하려는 사람들로 북적대지요. 교회와 각종 구호 단체의 요란하던 자선의 손길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루루 철수합니다. 마치 모두를 취하게 했던 마법이 풀린 것 처럼 성탄 다음 날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공허하고 쓸쓸하기도 합니다.

축제 다음 날, 새로운 일상의 시작

사진 출처 = www.flickr.com
성탄 다음 날의 풍경은 실제로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기와 아기 엄마가 맞는 출산 다음 날 풍경과는 참 많이 다릅니다. 아기와 엄마에게 출산은 아홉 달 연결되어 있었던 생명의 나눔이며 기대의 결실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입니다. 시작에는 물론 낯섬과 불편함이 따르지요.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였던 엄마의 몸에서 나와 세상에 던져진 아기는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듭니다. 먹고 배설하는 기본적인 생존 방식도 배워야 하고, 욕구와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익혀야 하고, 엄마의 몸에서 떨어진 외로움도 버텨내야 하죠. 엄마에게도 낯설고 힘든 시간은 마찬가지입니다. 말도 못하고 울 뿐인 이 작은 사람 하나를 위해 엄마는 자신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24시간 내내 편하게 몸을 누일 수도 없고, 먹고 싶은 음식을 맘대로 먹을 수도 없고, 생각에 잠길 여유 조차 없어요. 아기가 아프기라도 하면 자신이 아픈 것보다 더 고통스럽지요. 제가 아는 어떤 엄마는 너무 힘들어 차라리 아기를 뱃속에 도로 집어 넣고 싶어질 때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한 인간의 탄생은 매순간 축복이지만 이렇게 큰 책임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돌보는 이들의 관심과 헌신이 없다면 이 작고 무력한 생명은 이내 꺼지고 말겠죠. 고귀한 한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들의 자기 비움과 포기가 필요합니다. 출산 다음 날은 이렇듯, 전과 다름 없는 나날이되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 새로운 일상의 시작입니다.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를 구유에 누인 마리아와 요셉의 ‘다음 날’ 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제단에 장식되어 있는 구유 속 아기와 아기를 바라보는 젊은 부부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영원히 정지되어 있지만, 실은 무척 떨리고 분주한 새 아침을 맞았을 거에요. 천사 가브리엘이 이르길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를 세울” (루카 1,32 참조)아기가 이제 세상에 나왔습니다. 젊은 부부는 온갖 의혹과 오해를 감당하며 아홉 달을 보냈지요.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다리던 그 생명이 눈 앞에 있지만 부부는 아직 모든 것이 서툽니다. 밤새 뜬눈으로 안절부절못했을 것이고, 마굿간 동물들의 소리에 행여 아기가 깨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했을 것이고, 낯선 곳에서 노숙인이나 다름 없는 신세이니 산모의 젖이 마르지 않게 할 하루의 끼니 또한 걱정했을 것입니다. 세상을 뒤바꿀 예언은 자기 목 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힘없는 생명으로 육화하여 젊은 부부의 손에 맡겨져, 이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이 자라나 사람들 앞에 서기까지, 부부는 성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불면의 밤들을 보냈을 것입니다.

▲ 12월13일 쌍용차 평택공장 안 굴뚝에 올라간 두 조합원이 손을 흔들고 있다.(사진 출처 = 전국금속노동조합)

축제가 아닌 일상, 살아갈 날들

성탄은 연약한 아기로 오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돌봄과 사랑이 필요한 숱한 일상, 다음날들의 시작입니다. 축제의 화려함은 지난하고 꾸준한 일상을 가려 버리지만, 아기가 살아 낼 날들은 축제가 아니라 일상이지요. 아기의 운명도, 아기가 실현할 약속도 이제 그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아기가 살아갈 우리의 “일상”은 일그러져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던 그 날,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배를 깔고 바닥을 기어야 했습니다. 정규직 전환 약속을 거듭 파기한 회사측에 맞서 근 일 년 사무실 농성을 이어 가던 끝에 목숨을 건 오체투지 고행길에 나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겪고 있는 “일상”의 모습입니다. 그보다 얼마 전,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던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의 노동자들은 또 다시 70미터 높이의 굴뚝에 올랐습니다. 이날 또 한명의 해고 노동자가 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2009년 정리해고 뒤 스물 여섯 번째 죽음입니다. 시시각각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오늘 우리 “일상”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4월 16일, 304명의 싱그러운 생명들을 한꺼번에 앗아간 세월호참사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아이들이 죽어 간 이유를 알고 싶다는 부모들의 절규는 자꾸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팽목항에는 아홉 명의 실종자들을 기다리며 아직도 잔인한 봄을 살고 있는 가족들이 있는데, 수색을 포기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인양마저 포기하겠다는 이야기가 새어 나옵니다. 수백 일째 돌아오지 않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비틀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비일상을 일상처럼 살아갑니다. 힘가진 소수들은 우리더러 말로는 일상으로 돌아가라지만 실은 축제만을 바라보며 살라 합니다. 축제가 머지 않았으니 잠시 견디라 합니다. 부당한 노동 조건은 좋은 경험이니 나중에 이로울 약이 될것이라 합니다. 과거사도 잊고 이웃의 고통에도 눈감고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면 신나는 축제가 펼져질 것이라 합니다. 안정과 경제 성장이라는 축배를 들기 위해 잠깐의 고통 정도는 잊으라 합니다. 그들만의 축제를 위해 우리는 약에 취한 듯 이 비일상적인 일상을 견뎌 내고 있습니다.

이 참담한 “일상”으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가 세상에 온 성탄 이후 일상은 그 전의 일상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축제로 흥청거리던 비일상을 아기는 치열하게 살아야 할 일상으로 되돌립니다. 아기는 우리에게 자신의 순전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연약한 피부로 세상을 느끼길 요구합니다. 끊임없이 주시하고, 작은 몸짓까지 기억하고, 즉시 반응하기를 요구합니다. 아기와 함께 하는 일상은 이렇게 우리 눈과 몸짓과 감수성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합니다. 이제 일상의 주인은 이 작고 무력한 아기입니다. 그 일상은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아기의 울음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듯, 연약한 목숨들의 아픔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아기를 위해 마음과 몸을 내어 주듯 약하고 서러운 이들에게 주권을 돌려야 합니다.

▲세월호참사 뒤 17일째인 지난 5월 2일 진도 실내체육관의 모습. ⓒ정현진 기자

젊은 부부는 아직 추운 거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스팔트 바닥 위에 배를 깔고, 별이 가까운 고공탑 위에서 칼바람을 견디며, 겨울 바다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고 아직 그곳에 있습니다. 이 “일상” 속에 태어난 아기를 먹이고 품고 길러야 할 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기로 오신 하느님께 빚지고 있듯, 연약한 이들의 희망이 꺼져 버린 세상에는 우리의 희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핏덩이 아기가 실현할 예언은 아직 너무 가냘퍼 들릴 듯 말 듯, 울음 소리로 터져 나올 뿐입니다. 우리의 돌봄이 없다면 아기는 이 겨울을 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새해가 밝습니다. 다시, “일상”입니다. 지난 해와 같지 않아야 할 “일상”입니다.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어 춥고 지친 아기를 안고 업으며, “종이로 등을 만들어 손에 들고, 사방 눈가린 안개를 헤치고 헤쳐” 기도를 드리며 아기를 돌보아야 할 우리의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효녕 시, “성탄절에 올리는 기도” 중에서).

여러분, 살아갑시다.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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