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그 작은 성당에 저는 아직 가 보지 못했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었던 착한 소년 성호 임마누엘의 이름을 가진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아름다운 성당, 예수를 닮은 목수들이 눈물과 기도로 나무를 다듬고 바닥을 깔고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와 서까래를 올려 지었다는 그 성당 말입니다. 바다 건너 멀리 살고 있는 것이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만, 성호의 성당이 축성되던 날은 특히 그랬습니다 (관련기사 '성호의 성당' 축성되다)

▲ '성호의 성당' 내부 전경. ⓒ정현진 기자
지붕 위 예쁜 종탑은 소년이 다니던 선부동 성가정 본당의 종탑을 닮았다지요. 대여섯 사람이 들어가면 꼬박 찰 정도로 자그마하고 아늑하다지요.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타고 들어와, 성호가 보고 싶어 찾아 온 이들의 얼굴에 장미꽃도 수놓고, 구름도, 천사의 날개도 그린다지요. 사진 속 성당의 성모님은 바람결인 듯 머리카락 나부끼며 당신 품에 잠든 아기 예수를 놓칠세라 꼬옥 안고 계십니다. 그날, 차가운 바다 속에서 몸을 떨었을 성호와 303명의 가여운 영혼들도 그 품에 안겨 단잠을 자겠지요. 이제 그 성당은 그들이 못 다 이룬 꿈과, 그들을 기억하는 우리들의 꿈을 버티어 줄 거룩한 성사(聖事)로 그 자리에 오래 오래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사(聖事)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성호의 성당, 우리 가슴에 달려 있는 노란 리본들, 세월호의 기억을 담은 노래와 시와 그림과 공연들을 “성사”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사란 단어의 기원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그리스어 “신비” (mysterion)입니다. 감추어졌던 하느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 단어가 서약, 맹세, 위탁을 보증하는 물질을 일컫는 라틴어 단어 “사크라멘툼”(sacramentum)으로 번역된 계기는 2세기 교부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세례식에 “그리스도 군사의 선서” (sacramentum militia Christi)란 말을 사용하면서부터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통해 군인처럼 강한 결속력과 의무감을 가지게 되길 바랐던 모양입니다. 그 이후 사크라멘툼은 점차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거나 은총을 담보하는 매개체라는 의미로 굳어지게 되었고, 우리말 용어로는 “거룩한 것 혹은 거룩한 일”을 뜻하는 “성사”(聖事)로 번역되었지요. 한편 은총이 창조 세계에 드러나는 원칙과 성질은 “성사성”(聖事性: sacramentality)이라고 부릅니다.

좁은 의미로 성사는 일곱 성사(세례, 견진, 성체, 고해, 병자, 성품, 혼인)를 가리킵니다. 우리들 삶의 여정, 통과 의례의 구비 구비마다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축복을 기억하고 감사드리기 위한 대표적인 예식들이지요.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또한 최근 신학에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모든 순간, 경험하게 하는 모든 사건과 형상도 성사라고 부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도 성사고, 우리의 몸도 성사고, 우리의 눈물과 웃음도 성사고, 축복인 듯 아쉬움인 듯 오고 가는 계절도 성사며, 추운 겨울 길모퉁이에 서서 울며 우리의 온정을 일깨우는 길고양이도 성사입니다. 즉, 하느님의 숨결과 미소와 탄식을 드러내는 창조세계의 모든 것들이 성사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귀하게 여겨야하는 까닭이 여기 있지요.

그리스도교 성사의 원형, 즉 “근원적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느님께서 참 인간이 되어 인간과 함께 살았던 강생(降生), 성육신 사건은 다른 모든 성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귀하고 본질적인 성사이지요. 많고 많은 성사 중에서도 어떤 성사는 바로 이 근원적 성사성, 즉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며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더 가깝게 초대합니다. 이런 성사는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이 그랬듯, 탐욕과 신음으로 가득 찬 짐승들의 세상을 죽비로 내리칩니다. 모두가 믿고 있는 사실이 실은 거짓일 수 있음을 천명하고, 모두가 따르고 있는 질서가 맘몬의 질서임을 밝히고, 모두가 귀하다 하는 것들이 신기루임을 보여 주지요. 그러기에 성사는 항상 달콤하고 부드럽고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때로 거칠고, 날카롭고, 불편합니다. 우리의 못나고 부끄러운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그렇게 뒤집어진 질서 속에서 실낱같이 남아 있는 우리들의 선함 마음을 비추어 내기도 하지요. 이런 성사들에는 대체로 고통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 의정부교구 염동국 신부가 직접 만들어 기증한 청동 성모상. 작품 제목은 '성모 마리아, 아기를 안고 들로 나서시다' ⓒ정현진 기자
일곱 성사 중에서 근원적 성사의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성사는 성체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목숨을 던져 생명의 빵이 되어 잘게 부서져 우리들 몸으로 스며드는 그와 하나가 됩니다. 성체를 입에 넣는 순간 마다, 그의 살과 나의 살, 그의 피와 나의 피, 그의 인격과 나의 인격, 그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하나 되는 놀라운 신비를 겪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사를 통해 그와 일치한다는 의미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도 아니고, 세상의 고난으로부터 영적으로 자유로워지거나, 나와 내 이웃의 아픔에 무감각해지는 최면 상태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가 그랬듯, 인간을 향한 연민이 너무 깊어 도무지 고통에 대한 면역을 키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의 심장으로 세상을 아파하고, 그의 연민으로 세상을 보듬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와 함께 고통과 죽음을 딛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체성사 뿐만은 아니지요. 고난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느끼는 모든 순간들은 거룩한 성사, 고통의 성사입니다. 시몬 베유는 이 고통의 성사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 성사를 살기 위해 기꺼이 투신했던 사람이지요. 베유는 고통 중에서도 가장 극심하고 가장 비참한 상태, 모든 것을 박탈당한 상태, 아무런 위안조차 없는 상태(affliction) 속에서 신의 사랑과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예수,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 받은 예수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바로 그런 것이니까요. 고통 자체가 은총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참혹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건져 올릴 때, 고통은 성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참혹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주시(attention)하며 동참할 때, 고통은 성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고통을 통해 사랑을 주는 자와 받는 자가 하나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이 고통의 성사입니다.

4월 16일의 참혹한 기억을 나뭇결마다 아로 새긴 성호의 성당, 가슴에 달려 있는 노란 리본, 그날의 아픔과 그 이후의 부조리와 분노를 담은 노래와 시와 그림과 공연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의 성사입니다. 그날을 결코 과거로 만들지 않으려 분투하는 모든 호소들,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모든 소리들도 성사입니다. 이제 들불로 번져 가고 있는 세월호 순회 미사를 정성스럽게 봉헌하는 사제들의 마음도 성사입니다. 식상하고 지루하니 이제 좀 그만하라고 아무리 핀잔을 들어도 광화문 앞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묵주를 만들고, 책갈피를 만들고, 목도리를 뜨는 손길들도 성사입니다. 이 모든 몸짓들이 이 참혹한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라고, 여기 그리스도가 죽어 가고 있다고, 우리를 일깨우는 고통의 성사입니다.

그 고통의 성사를 부활의 성사로 전환하기 위해 우리의 몸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추상이 되고 망각으로 사라지기 전에 그렇게 살덩어리로 만들고, 눈에 담고, 귀에 담고, 손끝과 발끝에 담고, 기도로 되뇌어 우리 몸에 새겨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고통의 성사가 될 때 우리는 삼백사 명의 영혼과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고통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되살아난 그리스도의 몸에 남아 그의 부활을 증거한 것은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였습니다.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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