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장 마크 발레 감독, 2014년

“변화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자기 안에 있다.” 젊은 여성 셰릴 스트레이드는 자신의 몸만큼이나 크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끝없이 펼쳐진 길을 하염없이 걷는다. 영화 "와일드"의 주요 공간인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은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서부를 종단하는 4286킬로미터의 도보여행 코스다.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했다가 중도에 나가떨어지는, 극한의 공간 PCT를 걷는 한 여성의 실화를 다룬다.

▲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리스 위더스푼 분)(사진 제공 = 20세기폭스 코리아)

그녀가 목숨을 건 지옥 행군을 하는 이유가 못내 궁금하다. 영화는 한 여성의 인간승리의 감동 드라마이지만, 미스터리 구성을 띠며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주인공에 밀착하여 과거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들며 모자이크를 함께 완성해 나가는 여정이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는 얼마 전까지 인생을 막 살았다. 약에 절고, 아침에 깨면 낯선 남자가 옆에 있었다. 한때는 명문대를 다니며 남편도 있던 여자, 그리고 엄마가 몹시도 자랑스러워 하던 딸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는 한 가지였다. 엄마가 암으로 사망하자 인생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발톱이 찢겨 나가거나, 낯설고 두려운 여행객과 마주치며 두려움을 느끼거나, 장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위기에 빠지거나, 영화는 오랜 여행을 하는 방랑객이 겪을 흔한 위기를 차례로 보여 준다. 그러는 가운데 그녀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느낌을 글로 남긴다. 왜 그녀가 쓰레기가 되었는지, 왜 그녀가 고난을 스스로 자처했는지, 그녀는 누구인지, 앞으로 무엇이 되려고 하는지.... 그녀는 자주 거울을 보고, 자주 노래를 흥얼거리고, 자주 별을 바라본다. 유려한 편집술을 통해 관객은 문득 그녀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 그녀가 겪었던 일들을 목격한다.

사진 제공 = 20세기폭스 코리아
가난하고 배운 것이 별로 없는 엄마였다. 하지만 엄마는 자식을 지키고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꺾지 않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남편의 상습적 구타에서 탈출하여 홀로 딸과 아들을 키워 냈다. 게다가 딸을 자신이 희망하던 지적인 여성으로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인생이 살 만할 때 중년의 엄마는 대학에 입학했다. 그녀는 실용적이지는 않지만 인생을 풍부하게 해 줄 문장의 참맛을 알아 가고 있었다. 딸은 가끔씩 무안 주는 말로 엄마에게 상처를 입혔다.

어느 날 딸의 인생의 큰 등불인 엄마가 사라졌다. 한없이 밑바닥으로 떨어져 더 이상은 갈 곳도 없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던 딸로 돌아갈 테야”라고 선언한다. 미숙한 그녀는 대책 없이 떠난다. 평균 152일이 걸리는 극한의 도보여행 코스, 연간 125명만이 겨우 성공할 뿐이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대고독의 공간 PCT에서 맞닥뜨릴 육체적 고통과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녀는 다시는 갱생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으로 맞선다. 94일간의 사투, 수려한 경관과 야생의 위험이 공존하는 그곳은 그녀에겐 영적인 여정이었다.

셰릴 스트레이드의 자서전 “와일드”는 2012년 출간과 함께 <뉴욕타임스> 논픽션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앙코르’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리스 위더스푼은 ‘와일드’를 비행기 안에서 읽고 내리자마자 작가를 찾아갔다. 위더스푼은 당장 영화로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에이즈를 이겨낸 남자의 실화를 다룬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빛나는 연출력을 보여준 장 마크 발레 감독과 손을 잡았다. 발레 감독은 병마와 싸우는 남자의 심리 변화를 잘 포착해내었고, 주연을 맡은 매슈 매코너헤이가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게 할 정도로 영화를 훌륭히 연출했다.

▲ 사진 제공 = 20세기폭스 코리아
세 명의 열정적인 사람들이 만나서 이루어 낸 결과물은 딸과 엄마의 보이지 않는 영적 교감에서 만들어지는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심혼에 자리한 여신으로 남아 있는 엄마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딸의 영혼을 일깨우며 생의 진정한 주인이 되도록 인도한다. 똑똑한 엄마, 부자 엄마, 압도적인 엄마는 아니었다. 그녀는 늘 작은 소리로 노래했으며, 흥에 겨울 땐 춤을 췄고, 공부하고 있었으며, 동물과 자연이 주는 위안을 진정으로 즐거워했다. 사라진 엄마는 새가 되고, 여우가 되고, 별이 되고, 바람이 되어 셰릴 주위를 맴돈다. 극한의 고행 가운데 자연이 주는 기를 받으며 셰릴은 자신 안에 자리한 변화의 문을 여는 손잡이를 잡는다.

엄마들과 딸들에게 이 영화를 진심으로 권한다. 촬영, 풍경, 편집, 연기, 음악, 대사 등 많은 부분에서 만족스럽다. 딸과 엄마를 연기한 두 배우들(리즈 위더스푼, 로라 던)은 올해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엄마가 읊조리던 ‘엘 콘도르 파사(철새는 날아가고)’를 딸이 따라할 때,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된다. 1970년에 발표된 사이먼&가펑클 버전의 노래가 영화의 여운을 더욱 깊게 만들어준다. 더구나 다음 달에 아트 가펑클이 한국을 찾는다니 이 아니 반가울쏘냐.
 

사진 제공 = 20세기폭스 코리아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동국대, 수원대 출강 중.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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