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 2012년

▲ '액트 오브 킬링',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2012년.(사진 제공 = (주)엣나인필름)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는 100만 명 규모의 대규모 학살사건이 자행되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학살의 가해자들은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자신들의 영광의 역사를 널리 떠벌리고 있다. 미국인 다큐멘터리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2004년, 인권 단체의 요청으로 학살의 피해자를 취재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들어갔지만, 인도네시아 정부와 군, 그리고 심지어 NGO 단체까지 취재를 번번이 방해한다. 오펜하이머 감독은 차선책으로 가해자를 담기로 결정한다. 피해자들이 침묵하고 있는 반면,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자랑스러워하며 미국에서 온 이방인 감독의 촬영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예상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프레만’이라고 불리는 불법 민간 폭력조직의 일원들이었던 대학살의 가해자들은 감독의 요청에 따른 학살 장면 재연에서 자신들이 영화배우라도 된 양 고문과 살인 장면을 환희에 차서 연기한다. 반성과 회환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가해자들은 자긍심에 차서 함께 영화를 만드는 데 공을 들이고, 그들의 놀라운 헌신은 역사상 보기 힘든 새로운 스타일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게 했다.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를 축출하고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수하르토 소장은 인도네시아의 공산당 세력을 없앨 기회를 보고 행동에 나섰다. 합법 정당인 공산당을 괴멸시키기 위해 국군이 전면에 나설 수는 없는 일인지라 수하르토는 이슬람 세력과 반공 민간세력인 프레만을 선동해 그들에게 무기를 지원하고 학살을 지시했다. 공산당원과 중국계 화교들을 적으로 지목하고 피의 대학살이 진행되었다. 피해자 100만 명에는 공산당원만 있는 게 아닌 것은 당연한 일이어서 여성과 아동을 포함한 죄 없는 민간인들이 잔인하게 살해되고 그들 가족들은 그 이후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게 되었다.

영화에 담기게 될 ‘살인 연기’는 대학살을 추억의 영웅담으로 기억하는 가해자들에겐 자신을 기록할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영화의 중심인물이자 열혈 프레만인 안와르는 극장업에 종사하는 인물로, 평소 존 웨인과 엘비스 프레슬리를 숭배하며, 자신이 시드니 포이티어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학살극을 재연해 보지 않겠냐는 감독의 제안을 적극 수용하는 것 이상으로 그는 영화 만들기에 애정을 쏟아 붇는다.

▲ 영화 주인공 안와르(가운데)가 등장하는 장면.(사진 제공 = (주)엣나인필름)

안와르와 동료들은 할리우드 갱스터 영화에서 보았던 살인 방법을 그대로 써 먹었고, 공포 영화에서 적을 대하는 방법을 흉내 내었으며, 학살이 끝난 뒤 뮤지컬에서처럼 노래하고 춤추며 환호했다. 오펜하이머의 카메라는 가해자들을 인터뷰하며 사건의 이면을 들추고, 그들의 살인 재연을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 우리는 잔인하고 이국적이면서 동시에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영화를 보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의 작업 윤리란 것을 떠올린다. 가해자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서사를 만드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말할 기회조차 없는 피해자들의 장이 끊어지는 아픔은 어찌할 것인가.

가해자의 서사로 이루어진 영화는 어느새 균열의 틈새를 만들어 낸다. 영화 작업에 들뜬 마음으로 참여하던 안와르는 잠시 멈칫하며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학살의 피해자들의 고통은 어떠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그를 보며, 그도 어쩌면 양심이라는 것, 죄책감이라는 것, 인간의 심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느끼게 해준다. 대학살의 재연 장면 연기 뒤, 피해자 가족을 연기한 이웃 아이들과 여인들의 울음이 멈추지 않는 것을 목격하며 회한에 잠기는 듯하다. 자신의 육체가 이에 직접적인 반응을 하는지, 사람들을 무수히 죽였던 그 장소에서 갑작스레 구토가 일어나고 그치지 않는다.

사진 제공 = (주)엣나인필름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잔악한 죄악을 진정으로 깨닫기를 바라는 것은 순진한 바람일까? 안와르는 공산주의자들이 죽음으로써 천국에 갈 기회를 주었으니, 자신의 학살 행위는 진정 인간을 위한 성스러운 종교적인 행위라고 위안하는 것으로 원래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다. 연기하는 가해자의 영화 만들기를 찍고 있는 카메라 앞에서 우리는 그들의 진짜 모습을 발견한다.

그들은 잘못을 알지 못하므로 회개하지도 않을 것이고, 피해자들은 용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이러한 잔인한 현실은 인도네시아만의 일이 아니다. 전쟁포로 수용소에서 이라크 수감자들을 고문하며 그 앞에서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던 미군 병사들, 민주 인사들을 때려잡던 고문 전문가들의 당당한 신앙 간증, 국가에 충성한다는 명분으로 약자와 피해자에 대한 조롱을 정당한 일로 생각하는 서북청년단 재건위. 이토록 끊임없이 벌어지는 가해자들의 서사를 접하며 안와르는 특별한 주인공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영화를 보는 것은 인내를 요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먼 나라 과거의 일만은 아니기에 우리는 불편하더라도 악몽과 폭력 서사를 마주해야 한다. ‘액트 오브 킬링’은 아카데미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베를린 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관객상과 에큐매니컬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같은 사건의 피해자를 다룬 ‘침묵의 시선’이라는 작품으로 부산 국제영화제를 찾았고 씨네필 상을 수상했다. 한국계 여성 크리스틴 신과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익명의 인도네시아인이 공동 프로듀서를 맡아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인 이 사건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사진 제공 = (주)엣나인필름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동국대, 수원대 출강 중.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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