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영 신부] 1월11일(주님 세례 축일), 마르 1,7-11.

요르단 강, 요한은 세례를 주고 있었다. 예수는 강둑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강물은 저렇게 흘러가는구나, 세상은 저렇게 흘러가는구나. 이내 예수는 내려와 요한을 향해 물살을 거슬러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긴다. 흘러오는 강물이 예수의 다리와 몸에 부딪치더니 다시 아래로 아래로 흘러간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관상하다가 생뚱맞게 연어 이야기다. 연어는 강에서 부화하고 태어난 뒤, 강을 따라 바다로 삶의 자리를 옮긴다. 약 4년 정도 바다에 살다가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곳을 향한다. 바다에서 모천(고향)을 향한 물길은 아주 험난한 여정이다. 때로 그 길은 수백 수천 킬로미터. 게다가 수많은 지류가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다. 물고기에 잡혀 먹힐 수도 있고 그물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 폭포를 만나면 거세게 쏟아지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온몸을 휘저으며.

▲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사진 출처 = www.geograph.org.uk)

연어가 어떻게 모천을 찾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지만 정확한 과학적인 설명은 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학설 중에 그래도 신빙성이 있는 것은 연어가 어린 시절 맡았던 강물 냄새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기억 때문에, 또는 그 기억의 힘으로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도착한다. 알을 낳기 위해 집을 만들고, 그 안에 알을 낳는다. 그리곤 그 험난한 여정을 거쳐 오느라 지친 연어는 죽는다. 며칠 후에 수많은 새끼가 태어나고, 그 어린 새끼들은 죽은 어미 살을 먹고 자란다. 연어의 이런 삶이 그저 본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슬프고 아름답다. 거룩하고 숭고하다.

연어가 모천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새끼 때 맡았던 강물 냄새에 대한 기억이라면, 나는 어떤 기억이 있을까? 그 기억은 오래전에 일어난 어떤 일이 내 뇌에 저장된 그 무엇이라기보다, 한 인간으로 태어날 때, 우리 존재에, 우리의 혼에 저장되어 있던 그 무엇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내 존재가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내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던 분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성이 우리 안에 새겨져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모천인 하느님을 향해 살아가는 여정이다. 따라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 생명이 시작된 곳, 내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출발점인 것이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보며, 그 모상에 따라 더욱 인간답고 거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원의가 움터 오른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갔던 예수님의 길에 우리도 들어서게 된다.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 외치는 광신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가톨릭신자만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이 세상사람 모두를 가톨릭신자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다른 종교인들도 복음적인 가치를 살아간다. 선의의 사람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세례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는 복음적인 가치에 삶의 뿌리를 내리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좀 더 인간다운 세상, 좀 더 공평하고 좀 더 따뜻한 세상, 좀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도록 기도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들을 응원하고 그들과 함께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연어가 모천을 향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수많은 위험을 만나고 난관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오직 살아 있는 연어만 강물을 거슬러 모천까지 다다랐고, 죽은 연어는 물살에 휩쓸려 저 아래로 떠내려갔다.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속적인 이 세상의 강물을 거슬러 살아간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무시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수단화하고, 복음의 가치를 부정하고, 지극히 천박한 가치가 지배하는 이 세상의 강물에 나를 맡길 때, 우리는 죽은 연어가 되어 흘러갈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오늘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예수님은 이 소리의 힘으로, 이 소리를 기억하면서 당신 삶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최성영 신부 (요셉)
예수회 성소 담당, 청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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