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총고백, 새로운 시작에 앞서 권장할 수 있는 것

총고백이 불법 무기 신고 같은 걸 의미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셨다면 비신자이시거나 교리상식 완전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는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것이 불법무기 신고가 아니라 고백성사와 관련 있는 말이라고 어림하셨을 겁니다.

총고백(총고해, confessio generalis)은 한 개인이 총고백을 하는 시점까지 살아 온 인생에 관한 것이거나 어떤 특별한 주제와 관련되어 설명하고픈 개인사를 고백성사를 통해 개방해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 사진 출처 = www.flickr.com
일반적인 고백성사(고해성사)의 시각에서 보면,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그때그때 고백성사를 한 사람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소급해서 다시 고백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런 것 외에, 되짚어 보니 과거에 고백은 하였으나 그것이 과장 혹은 축소된 채로 고백되었다는 걸 깨달았거나 그냥 묻어둔 채 지내온 것에 대해서는 과거에 비록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로 묶어 고백을 하였다고 해도 다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총고백을 통해 다루어질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고백한 내용에 대해서 뭔가 새로운 깨달음이 열린다면 삶을 좀 더 잘 정리하고 새로운 분위기로 살아보겠다는 결심의 표시로 총고백을 하는 것을 권장해 볼 만합니다. 따라서 삶의 전환점이 될 만한 시기에 총고백은 새로운 결심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가톨릭 신자들의 삶에는 그런 시점이 혼인성사를 앞두거나 성품성사(신품성사)를 앞둔 시점, 혹은 수도회 입회와 같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자기 봉헌을 하고자 결심했을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수도회에 입회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총고해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을 것이라 어림해 봅니다. 제가 총고백이란 말을 처음 들은 때는 수도회 입회를 준비하려고 성소모임에 다니던 기간이었습니다. 모임에 문을 두드렸을 때, 성소담당 수사님이 선물해 준 책이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자서전"이었습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칼 두 자루를 맡기고 총고백

지금은 그 의미를 더 잘 알게 되었지만, 밋밋한 표현으로 기술된 이 책은 당시에 제게 흥미롭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군더더기를 넣고 싶어하지 않은 이냐시오의 의도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냐시오는 프란치스코, 도미니코 성인처럼 열정적으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고자 결심하고 순례의 길을 떠나려는 시점에서 총고백을 합니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죄상을 적은 데 사흘이나 소비한 뒤"(자서전 17항) 총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에 군인이었을 때 사용하던 장검과 단검을 성당(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몬트세라트 산의 베네딕도 수도원 성당)의 성모 제단에 간수해 달라고 고해 사제에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냐시오가 들렸다는 몬트세라트의 그 수도원에 찾아가 봤는데, 이냐시오가 성모 제단에 바쳤다는 칼은 못 봤습니다. 그 칼을 스페인 예수회원들이 찾아다가 이냐시오의 생가에 가져다 놓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가에 가면 칼이 하나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칼이 이냐시오의 것인지는 불확실 하다고 들었습니다. 이냐시오가 살았던 그 시기에는 회심하여 온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살아가겠다며 산 위의 그 수도원에 찾아온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기에 성모 제단 옆방에는 그런 칼들이 그득하였다고 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이냐시오의 것이었고, 그나마 방이 차면 어딘가에 몽땅 치워 버렸을 텐데 어떻게 찾아왔는지 알 수 없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분위기가 그랬으니, 총고백을 하는 사람들도 전통적으로 많이 있었다고 어림해 볼 수 있습니다. 회심하여 순례자로 살아가겠다고 자루 옷을 입고 나타난 많은 사람들의 총고백을 듣는 사제들은 종종 적잖은 혼란을 느껴야 했을 것입니다. 총고백이라 길이도 길지만, 그 열정 때문에 그들의 고백이 솔직한 것인지 과장된 것인지, 성령의 이끄심에서 오는 것인지 악령이 무리한 결심을 이끄는 것인지 가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는 그때 자신의 총고해를 들은 사제의 권고로 잠시 산 주변의 마을에 머물면서 자신의 열정이 성령의 이끄심인지 악령의 교활한 책동인지를 점검해 보는 기간을 가지게 됩니다. 만약 삶에 대한 새로운 결심을 앞두고 총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람으로 살다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총고백을 통해 진실하게 자신의 모습을 하느님께 드러냈으며, 하느님께서도 그런 그의 마음을 들으셨고, 그를 더 성숙하고 완성된 도구로 키우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의 삶을 본받아, 저도 입회 후 나름대로 총고해라는 것을 했었는데, 매우 소극적이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자기 봉헌을 통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실현해 보겠다는 포부보다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더 컸던 까닭입니다.

하느님께서 적당히 당근과 채찍을 주시지 않았다면 감당하지 못했을 삶이지만 본격적인 그 시작점에 총고백의 시간이 있었고, 제 어리석은 원의를 하느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을 이제 와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삶이 타성에 젖어 흘러가는 삶이 될 위험에 빠져들 무렵이면, 총고백을 한 번 더 해야겠습니다. 저는 쇄신된 삶을 원하며 하느님께서 그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총고해의 유의점, 죄를 낱낱이 밝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생활을 쇄신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죄에 대해 용서받는 것에 집착하시는 분들은 자칫 '세심증'에 빠질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세심증은 하느님께서 나의 삶에 어떤 손길을 건네셨는가를 보게 하기보다는 나의 죄를 낱낱이 밝혀 내야 한다는 태도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대하다 보면, 잘못이라 할 수 없는 사안까지도 잘못처럼 간주하게 되고 나중에는 신경증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습니다. 이 지경이 되면 고해사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심리상담가가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총고백의 기초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께 대한 신뢰라는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원(경기도 가평 소재) 운영 실무
서강대 '영성수련'  과목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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