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지난번 속풀이로 ‘대사(indulgentia)’에 관해 다뤄봤는데(6월 3일자 ‘전대사는 면죄부와 같은 건가요?’ 참고), 공교롭게도 고해성사(고백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니 보속은 꼭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는가에 따라 다를 수는 있으나, 죄를 용서받았다면 반드시 벌이 따라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에 매우 의미 있는 질문이라 여겨집니다.

흠, 그러고 보니 고해소(고백소)에서 종종 듣게 되는 고백 중에 하나가 ‘지난번 고해성사 때 받은 보속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저는 보통 지난번 고백 때 받은 보속을 이번에는 완수하시라고 다시 보속을 줍니다. 그리고 사죄경을 바칩니다.

이 경우에 고해성사를 본 신자는, 죄는 용서받고 여전히 보속은 남은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가 여전히 보속을 완수하지 않은 채 다음 번 고해성사에서 같은 고백을 하게 될지 여부는 저도 모릅니다. 만약 계속 그런 식이라면 그는 ‘상습적’으로 보속을 기피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습적 보속 기피 신자는 그렇다고 치고, 보속이 고해성사의 본질적 요건의 하나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논리상 하느님의 모습에 흠집을 낼 수도 있다는 문제도 제기됩니다. 즉, 죄를 용서받았으면 됐지 벌을 꼭 받아야 한다는 것은 모든 걸 탕감해주는 ‘쿨’한 하느님의 모습을 축소시키는 것 같기에 그렇습니다. 자칫 ‘옹졸한 하느님’을 만드는 결과를 낳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선 보속에 대해 조금 더 다뤄보는 게 좋겠습니다. 공동체로서 교회가 역사적으로 보속을 강조해온 것을 보면, 보속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요건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신자들로 하여금 자기 삶에 책임을 지도록 이끌려 했던 노력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속(補贖, 라틴어 satisfactio, 참회와 연관해서는 paenitentia)은, 남에게 끼친 손해를 물어준다거나(배상) 갚아야 할 것을 떼먹지 않고 돌려준다거나(보환)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런 의미가 가톨릭 신학 내에서는 고해성사의 본질적 요건 중에 하나를 구성하여 “이미 지은 죄를 징계하는 벌이요, 영혼의 허약함을 치료하여 다시는 범죄하지 않도록 하는 약”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가톨릭대사전 참조). 더불어 보속은 잘못에 대해 깊이 뉘우치는 참회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한 개인이 세례받기 전까지 범한 죄와 이에 따른 벌은 세례성사를 통해 없어지지만 세례 이후에 지은 죄는 고해성사를 통해 사해집니다. 그런데 지난 속풀이에 언급했듯이 고해성사를 통해서는 지옥에 떨어지는 벌(영원한 벌, 영벌)만 빼고는 잠벌(한시적인 벌)이 남게 됩니다. 이런 잠벌을 기워서 속죄한다거나 갚는 노력이 필요하므로 자연스레 보속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속은 세례자 요한이 가르치듯이 “회개의 합당한 열매”(마태 3,8)에 근거를 둡니다. 즉 말로만 회심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르는 행위를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속은 그것이 감당할 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초세기의 교회에서는 이것이 너무 엄하고 과했던 나머지 약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멍에가 된 예들이 많았습니다. 이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북돋우며 실천할 수 있을 만한 것으로 변한 것입니다. 보속의 내용이 주로 기도, 단식, 자선, 선행 등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은,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 보속을 제안하실 수도 있습니다. 자캐오가 주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나서 자신의 회심을 어떻게 보여줄지를 알리는 대목이 있습니다(루카 19,8). 자캐오라는 인물의 모습을 볼 때, 보속은 의무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용서받은 기쁨을 드러내는 자발적인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보속은 교회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에게 요구했던 것이기에 개인이 왜 그런 요구를 받아야 하는지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은 내 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다고 먼저 밝히는 방법을 활용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성서의 근거와 역사적으로 보속의 방법이 변화되어 온 것을 감안할 때, 보속이 부당한 요구가 아니라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보속을 이행함으로써 우리는 한 번이라도 더 기도하고, 선행을 베풀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보속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언짢아하실 분이 아니란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삶 자체가 보속인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사는 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이웃들과 함께 나누던 공간이나 먹거리들이 요즘은 담으로 둘러싸이거나 교환이 사라져버려 오갈 곳 없고 굶주리는 이웃을 더욱 절망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절망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연옥의 형벌은 부당하게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실 분이란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노력을 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합니다. 그러므로 보속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한 그런 노력의 의미를 생각할 때, 하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고해성사(고백과 화해의 성사) 안에서 필수적인 것은 진심어린 참회입니다. 이것 없이 하느님 그리고 공동체와 화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일까요? 그러니 적어도 일방적으로 지시받는 보속이 싫으시다면 앞서 말씀드린 방법을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즉, 내 편에서 하고 싶은 것을 제안해 보는 것.

교회가 생각을 바꿔서 고백에 따른 보속은 꼭 안 해도 된다고 하기 전까지는 공동체의 전통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 보속이 요구되는 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보속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보속을 내 삶을 스스로 책임지려 하고, 이웃과 내 것을 나누고 선행을 베풀며, 늘 화해를 모색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본다면, 보속에 대한 내적 태도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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