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18]

거의 두 달 만의 자유시간인가. 오늘은 남편이 집에서 애들을 보고 나는 서울에 가서 친구를 만나 놀기로 작정한 날이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새벽잠을 걷어 내고서 부지런을 떤다. 아직 입고 갈 옷도 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메리를 유치원에 보통 때 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데려다 줘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그렇듯 내 알 바 아니란 식으로 낄낄대며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딴 짓을 일삼으며 엄마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가는 것을 즐기는 악동들이다.

게다가 계속 들고 오는 책. 욜라에겐 책을 들고 와 내 목젖(?)에 들이대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다. 오늘도 내 목에 칼이 들어오나 했는데 책이었고, 그 거부할 수 없는 요청에 나는 만사 제치고 응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라이도 못한 채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그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아서 책을 읽어 준다. 처음엔 바쁜데 이러려니 성질도 나고 마음도 급해 무뚝뚝하게 건성건성 읽지만 한 장만 넘어가면 나도 모르게 몰입해서 열 번 스무 번을 읽은 책이라도 더 재밌게 읽어 주고야 만다. 사실 나는 아이들의 동화책이 참 재밌다. 얼마 전 기어이 디즈니 만화영화 원작 겨울왕국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와 읽었는데 아아 마지막에 얼음 마법에 걸린 안나가 언니 엘사의 눈물에 마법이 풀릴 때는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여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러면서 참 병도 병이다 그랬는데.... 오늘도 그런 식으로 금도끼은도끼 이야기에서 신선 목소리 실감나게 성대모사하며 애드립까지 하면서 혼자 쿨럭대다가 시간이 많이 오버되고 말았다.

동화책을 읽어 주니 이런 일이 생겼다

ⓒ김혜율

결국엔 촌각을 다투며 남편과 공동 합작으로 메리, 욜라 입에 밥 쑤셔 넣어 주고 당신은 욜라 맡아, 난 메리 맡을게. 하면서 허공에서 옷가지가 날아다니고 양말이 던져지고, 그 와중에 메리 자기 입고 싶은 옷 고른다고 고집이고, 그래 입어라 입어 니 맘대로 해라 하니 레이스 블라우스에 쫄쫄이 스타킹을 핑크로 맞추어 온다. 그거 낑낑대며 입힌다고 내 얼굴엔 땀이 맺히고 손은 벌벌 떨리고, 돌아보니 신랑이 맡았던 욜라는 패션 테러범이 돼 있고.(누나한테 물려 받은 공주 무늬 내복,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수면 조끼에 1980년대풍 ‘새마을잠바’에 파란 장화를 걸쳤다. 에라 모르겠다 차에만 타고 있을 거니 패스!) 시계를 보니 오우 겨우 시간 맞추겠네.... 차 예매 시간에 당도하기 위한 마지노선이다.

남편이 차에 시동을 켜고 아이들도 마당에 나섰는데, 오 나의 사랑하는 아부지, 제게 왜 정신을 챙겨 주시지 않으셨나요?!

내 머리는 한 열곡쯤 머리 흔들며 노래 부르고 무대에서 막 내려온 로커의 산발 머리. 옷은 아직도 입고 잔 그대로이다. 이 무슨 개떡 같은 상황이냐. 울음 섞인 괴성을 지르며 허둥지둥 옷더미를 마구 파헤쳐 보는데.... 아.... 머릿속이 하얗다. 입고 갈 옷이 전혀 없다. 그냥 뭐라도 몸에 걸치고만 갈 수 있다면 만족해야겠다는 결론을 빠르게 내리고 시야 확보와 머리 회전을 풀가동한다. 어제 빨아 개어 놓은 레깅스 어딨어? 내 레깅스으~! 없다 안 보인다. 그렇담 차선책으로 그냥 꽃바지를 입는다. 위에 입을 옷은? 모르겠다, 아무거나 주워 입자. 밖에 외투는? 며칠 전 유치원 학부모 간담회때 입었던 블랙 사파리 있잖아, 그걸로 이 모든 걸 가리는 거야.... 근데 위에 입은 니트 판쵸가 너무 부해서 팔이 안 들어간다. 이익 이러다 차 놓치겠어.

급기야 남편이 뛰어오고 (나는) 얼른 별채에 가서 나의 외투를 하나 찾아 다오 부탁한다. 나는 팔뿐 아니라, 이 몸뚱어리 모두가 쏙 들어가는 넉넉한 포대형 외투를 부탁하였고, 그 외투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마구 뛰어 차에 착석한 나는 울 것처럼 얼굴이 벌겋고 머리에선 스팀이 팍팍 나오고 있다.

“아흑흑, 어떡해. 나 전쟁 피난민 같지 않아? 오늘 내내 기분 전환은커녕 우울하고 슬플거야. 아흑흑.”

그랬더니 남편이 크게 웃으며 “ 아니야, 괜찮아~ 잘 어울려~” 한다. 괜찮다 하면서 왜 웃지? 뭔가를 숨기려는 수작이야.

분주함은 북유럽풍 디자인을 낳고

ⓒ김혜율
“괜찮긴 뭐가 괜찮아!”(버럭)
“정말 괜찮다니까~”
“아니야! 안 괜찮아! 내 레깅스 어쨌어! 내가 어제 분명 빨았는데 개서 어쨌어 엉? 왜 아무데나 넣어 놓는 거야!”
“난 개기만 했지 넣어 놓는 건 혜율이가 했는데?”
“아.... 그랬지. 근데 난 못 봤는데....”
“....”
“저기, 정말 괜찮아?”
“응, 그렇다니까아~”
“어떻게 괜찮은데?”
“음.... 북유럽풍이야.”
“뭐어? 북유럽풍? 북유럽풍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몰라? 나 북유럽디자인 책도 사서 읽었잖아.”
“흥, 그래도! 북유럽디자인, 인테리어는 있어도 사람들이 북유럽풍 옷 입고 다니는 건 못 봤을 텐데?”
“응 그러니까 대단하다는 거지- 혜율인 남들이 쉽게 구현하지 못하는 북유럽풍 디자인을 옷으로 구현했어. 그 꽃바지랑 외투, 그리고 목도리를 봐, 딱 북유럽풍이잖아. 아니면 도공? 그것도 그냥 도공이 아니야~ 청담동 도공 같애.”
“뭐? 푸하하하”


난 결국 엉뚱한 남편의 패션론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날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하하 이쯤에서 예전에 내가 개인 SNS 영역에 살짝 공개한 ‘그 남자의 패션’에 대해 다시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창조적 패션 감각

그의 일상적인 차림은 대략 이러했다. 물 빠진 티셔츠에 개량 한복 바지(발목엔 방울 대님).
시크하게 신은 쓰레빠. 헬멧 착장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캠퍼스를 누빈다.

저... 저것은? 양복에 스니커즈를 재해석한, 아니 보다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크로스오버, 믹스 매치룩! 한 패션 한다하는 패션 피플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를 일상에서 무심한 듯 구현하는 그는 누구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쩌는 클래식! 허니머스터드와 땅콩버터, 그리고 고추냉이색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색조화를 이루는 체크 남방을 가끔 입고 나타났는데, 듣자하니 중학교 때 사서 지금껏 입어 왔다는 하이틴 의류 브랜드 제품이라고! 현재, 키 186의 그는 여전히 박시(BOXY)한 그 남방을 아무렇지 않게 당당하게 입고 다녔다. 그것 말고도 쥐털색에 먼지 뭉치색, 그리고 썩은 부추색이 어우러진 남방도 기억이 나는군....

그의 패션은 이에 그치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면도 있었는데, 자기 엄마가 홈쇼핑에서 샀다는 사이키한 추리닝 세트가 그것을 대표한다. 위아래 모두 은갈치색이고 재질은 사이델리킥함의 절정, 비니루! 와도 같은.... 열과 습기를 방출하면서도 생활 방수가 가능한 신소재 무엇이라 했는데.... 그걸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꼴을 보고 특히 여자 후배들이 많은 질타를 보내고 있는 건 나도 목격한 바이다. 하지만 종횡을 아우르는 폭넓은 패션 취향이 어찌됐든 얼굴에 아무런 구김살이 없었던 그!

난 그를 남편으로 맞이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내의 ‘대왕 코디 내조’를 통해 그를 멋지게 변신시키겠노라고! 물론 허니머스터드 남방과 쥐털색 남방과 사이키 추리닝은 적당한 기회를 봐 헌옷 수거함에 빠뜨렸다.

기억난다. 강남에서 내로라하는 양복장이와 카페에서 미팅을 가지며 골랐던 양복의 천! 색깔! 고전적인 커프스 소매의 백색 와이셔츠들! 그의 복근과 흉근을 가로지르는 줄자의 촤르륵 촤르륵 하는 소리를.

거울 앞에 선 그에게...

▲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메리와 배웅 나간 욜라.ⓒ김혜율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흘러 인제는 거울 앞에 선 그여.... 오년 간의 야식과 외식, 간혹 있는 가정식으로 다져진 그는 초콜릿 복근에서 임신 말기 임산부의 배가 되었다. 터질 듯한 양복, 호흡곤란,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 이에 육아에 전념하느라 오랫동안 손을 놓았던 ‘아내의 대왕 코디 내조’를 재가동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래, 뚱보에겐 아메리칸이다! 잡스 선생이 프레젠테이션할 때 입은 청바지에 목티를 봐! 로봇 천재 데니스 홍도 역시 청바지에 팔목까지 자연스레 올린 셔츠를 입었잖아. 하면서 아메리칸의 정신이 깃든 것만 같은 저렴한 브랜드의 옷을 상당수 샀다. 그래도 청바지는 캘빈크라잉넛으로 레벨 업 시켰는데....

청년 시절, ‘난 넝마를 입어도 정신이 당당하다’라는 에세이까지 써서 학내 게시판에 게재했던 그가, 멋대로 세탁기 찌든 때 코스에 강력 건조로 돌려 버려 전체적으로 당근형이 된 캘빈크라잉넛 청바지를 조금이라도 늘려 보려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내게 말했다.

“저기.... 있잖아, 사람들이 내가 노는 줄 아나 봐. 낮에 가면 슈퍼 아줌마가 인사를 안 받아줘.”
“....”

욜라 외출복 입히라 하면 메리가 입던 퍼프퍼프 프릴~이 달린 티를 무심히 입히고 있는 패션 테러리스트 남편께,

아메리칸룩이고 뭐고 뱃살부터 빼자.
양복 같아 보이는 등산복이고 뭐고 뱃살부터 빼자.
세미 캐쥬얼이고 뭐고 뱃살부터 빼자.
멋진 양복 사 줄게.
그리고....미안하다 사랑한다.

여기까지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나는 오늘 막 북유럽발 비행기에서 내린 청담동 도공 같은 패션으로 서울강남에서 놀고 왔다. 남들이 나를 용서하든 말든 내가 나를 용서하고 나니 발걸음 또한 당당하였다. 새로운 패션적 해석을 뭇 대중들에게 남겨 놓고 오면서, 떠나지 않는 미소를 내게 준 남편에게 마음 깊이 감사하였다. 그리고 날 그 경지로 만든 우리 아이들에게도 영광을 돌린다.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다. 

 

 
 

김혜율 (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두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3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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