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15]

주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주말을 앞둔 저녁, 요즘 젊은이들이 ‘불금’이라 부르는 저녁에 나는 유난히 성스러워진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부디 주말을 잘 보내게 해 달라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신의 자비와 은총에 대해 묵상한다.

사실 메리는 유치원에 느지막이 가서 오후 2시도 채 못 돼 집에 오는 형편이고, 욜라는 집에서 놀고 먹는 중이라 평일에도 충분히 아이들과 부대끼고 있지만, 주말은 어쩐지 더 골치 아프고 혼란스럽다. 휴직 전 직장에 다닐 때 주말 근무가 걸리면 처음엔 억울하다가도 막상 가져온 책을 읽거나 인터넷 쇼핑이라도 할 짬이 나면, ‘오호, 생각보다 괜찮은데. 의외로 할 만해’ 생각하면서 달콤한 휴식의 기분을 느끼곤 했었다.

기어이 주말의 아침이 밝으면 깊은 심호흡을 하며 집안을 한번 죽 둘러본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주말 체크 리스트

▲ 가을 소풍이 즐거운 메리와 욜라. ⓒ김혜율
주말 나들이 일정 체크!(성당 외엔 없음. 어디라도 한 군데 추가하지 않으면 집에서 자폭할 염려)
냉장고 식료품 상태 체크!(재료가 동이 났거나 일부 썩고 있음. 고구마나 감자 등 구황작물로 한 끼는 버틸 수 있겠는데....)
체력상태 체크!(몇 년째 만성피로 중)
아이들 컨디션 체크!(국토대장정이라도 할 체력 충전, 추호도 낮잠 따위 잘 생각 없음)
남편 컨디션 체크!(배가 나온 것 말고는 나보다는 체력 우위. 그러나 낮잠을 꼭 자 줘야 하는 치명적 단점 보유)
집안 일거리 지수 체크! (먼지뭉치 갯수, 설거지거리 높이, 빨래더미의 위용, 굴러다니는 잡동사니 지수 최고레벨. 모든 걸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함)

아무리 상대를 알아도 지는 싸움은 있는 법. 대체로 전망은 어둡다.

대체 그 48시간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혹은 어떻게 해야 시간이 잘 가며), 무엇을 먹고(난제중의 난제),애들이 사이좋게(혹은 내가 애들과 싸우지도 않고)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창의력 문제이기도 하고 체력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국은 심리전이다.

토요일 일요일을 아이들과 꼬박 보내야 하는 것은 그림 못 그리는 내가 유치원 미술 시간에 백지를 앞에 두고 느꼈던 막막함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때 나에겐 매뉴얼이라는 것이 있었다.

일단 도화지 하단에 길게 가로선을 그리고 상부와 하부를 나눠 준다. 아래쪽은 땅이기 때문에 위쪽 공간만 채우면 되니 심리적인 부담감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 땅 위에는 집을 하나 그리고 굴뚝에 연기를 퐁퐁 띄운다. 꽃과 나무를 그린다. 사람이 서 있으면 좀 더 땅에 생기가 돌겠지. 이번엔 하늘이다. 해님과 구름을 그리고 날아가는 새 한두 마리를 그리고 나면 얼추 그림이 다 된 것이다. 순식간에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는 홀가분하게 선생님과 다른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다행히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나의 창의성이 씨가 마른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전혀 표출하지 않으셨고 결국 나는 똑같은 그림을 수십 장 그리고도 유치원을 무사히 우등 졸업하였다.(재롱 잔치 때 내가 유치원 대표로 청중들께 인사말을 하였으니 우등이면 우등이다!)

육아 매뉴얼은 어디에?

▲ 자전거 타고 소풍 가다 뒷좌석에서 조는 욜라. ⓒ김혜율
하지만 아이들과 놀아 준다는 것은 매뉴얼이 없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고 항상 변수가 따른다. ‘아이와 함께 성공적으로 놀아 주기 위한 사례별 해법’을 책으로 엮기로 마음먹었으면 나이 80살이 되어도 탈고를 마치지 못하거나, 매년 개정판을 내야 할 만큼 지난한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책방에 가면 ‘아이와 놀기 100선’ 같은 책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솜씨 좋은 엄마들의 자랑 같고, 뭔가 억지스럽거나, 치우기 힘들고 때로는 하품이 나올 만큼 시시하고 지루해서 그런 놀이는 유치원선생님께 양보하고 있다.(게으른자의 변명이기도)

때가 가을이라 동네 소풍을 다니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리차 한 병과 간식거리를 조금 싸들고 동네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산 위에 있는 흙집, 은사님 댁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자연 공부를 하고 참 좋겠네요’하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냥 자연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전부다. 흙냄새도 본인이 맡는 거고, 풀 색깔, 낙엽 빛깔도 본인이 느끼는 거고, 개울물 흐르는 소리도 본인이 듣는 거지 내가 해 줄게 뭐 있나. 안 그래도 나는 자연에 대해 하나 아는 것이 없다.

“엄마, 이 벌레 뭐야?” 라고 메리가 물을 때 마다

“응? 과연 뭘까?”, “글쎄~ 엄마도 모르겠네. ”
“엄마, 이거 사마귀야?”
“아니, 사마귀는 절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단다.”

그렇다고 어른스럽게 뭘 제공하는 것도 없다.
“엄마, 잠자리가 여기 앉았어! 잠자리 잡아줘!”하고 메리가 외치면, “미안~ 엄마는 잠자리 못 잡아. 메리 네가 잡아봐. 넌 할 수 있어!”해서 메리가 잠자리를 잡았는데 나는 메리 손에 잡힌 잠자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아이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장난을 쳐도 그렇고 개구리를 잡아서 손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릴 때도,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다가 뭔가 생명체가 구슬픈 소리라도 내면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애들한테 제발 그만하라고, 그러다 죽으면 어쩌냐고 하소연한다.

그래서 일단 자연관찰 책을 물려받았다. 메리가 그걸 보고 나한테 알려주면 좋으련만. 아직 글을 못 읽으니 사진이라도 보았으면 한다. 그러나 생명체에 대한 나의 과도한 조심스러움과 두려움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본다. 생닭을 손질해서 배를 갈라 그 속에 찹쌀, 대추, 마늘을 집어넣는 것도 못하는 엄마이고, 쭈꾸미를 만지다가 질겁을 해서 방바닥에 꿇어앉아 울고 있는 엄마니까.

사정이 이렇고 아이들이 아직 혼자서 바깥나들이를 하기엔 어리니 동네 소풍도 주말까지 끌고 갈 수는 없다. 가을은 축제의 계절! 주로 밖에서 시간을 보낸다. 햇살은 따스한데 쌀쌀하고 청량한 바람이 부는 가을 야외는 어디에서라도 행복한 기분이 든다.

결국엔 울었다

▲ 초록이 물든 비밀의 숲으로 소풍. ⓒ김혜율
주말인데 남편에게 일이 있어서 새벽부터 밤까지 온전히 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날도 가끔 있다. 에너지를 적절히 분배한다고는 하지만, 밤 아홉 시가 넘고 열 시가 넘어가면서는 점점 지쳐서 맥이 풀리고 이성의 끈을 놓기 일쑤다. 지난 주말도 그런 상황으로 아이들을 협박해서 겨우 재우고 마음 다잡기용 육아서를 한 권 집어 들어 읽는데 어찌나 부아가 치미는지. 책의 저자는 아이를 영재로 키운 아빠인데 초지일관 부처님 반 토막 같은 말만 하는 것 같았다. 책을 갈기갈기 찢어 던져 버리고 싶었는데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참고 읽다가 지지리 못나고 부족한 오늘의 나를 돌아보며 울기 시작했다. 울다보니 아이를 키우는 것 뿐 아니라 모든 것들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온갖 것들이 서러워져 더 크게 울다가 코가 막혀 서는 킁킁대고 있었다. 그때 남편이 귀가하였다.

“오늘 고생 많았지? 별일 없었어?”
“응. (컹)”
“어, 코 막혔네?”
“(흥, 모든 상황 종료되니 들어와 놓구선.) 쿨쩍.”
“감기 걸렸나?.”
“(아니 이 사람이! 나 운 거 모르겠나?)아니!”
“쌍화차 데워 줄까?”
“(쌍화차같은 소리 한다)아니!”
“코 많이 막혔네. 감기 걸렸나 보다. 에이구”
“(이익. 고개를 들어야 보일라나 보다) 아니! 감기 아니라고! 나 울고 있어! 엉엉엉”
하면서 수북이 쌓인 콧물 휴지 뭉치를 쓰레기통에 버리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슨 일 있었어? 오늘 욜라가 난리 폈어?”
“아니!”
“그럼 무슨 일이야? 내가 너무 늦게 들어와서?”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뭐야 왜 자기가 짜증이야) 몰라!”
하면서 고개를 획 돌려 쓰레기통에 휴지 뭉치를 버리는 순간,
“빡!”
“헉! 혜율이 괜찮아?”

남편이 가끔 척추 늘리기나 턱걸이를 하는 치핑디핑이라는 운동기구에 굉장한 소리를 내며 이마를 부딪치고 만 것이다. 정말로 세게 부딪혀 이마가 패이지 않았는지 심히 걱정도 되고 살짝 별도 보이는 것 같고....

그러나 심각함이 고조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갑자기 슬랩스틱 코미디는 아니 될 말이다.
내면의 슬픔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는 듯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 이불 위에 엎어져 버렸다.
그 이후에는 감정이 깨져서 남편의 걱정에 못이기는 척 어떡하다 이렇게 돼 버렸는지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았다. 내가 운 이유는 한두 개의 하찮은 이유가 아니라, 존재론적임을 강조 하면서. (결론은 혼자서 주말에 애 둘 보기 너무 벅찼다 이거였지만)

진정이 되자마자 지조 없이 남편이 사 온 초코칩 쿠키를 먹기 시작했다. 울고 나니 배가 고픈 걸. 코가 막혀서 맛을 잘 못 느끼긴 했지만 먹다 보니 쿠키 한 봉지를 다 먹어 치웠다. 남편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예상치 못한 아내의 쇼에 정신이 아찔하여 두통이 도져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대고 있었다. 아마도 다음 번 주말 일정이나 평일에 의미 있는 지방 일정이 있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마누라와 애들을 달고 가야겠다 마음먹고 있는 것 같았다.

휴우. 가을은 그렇다 쳐도 겨울엔 어떡하지? 창의력, 체력, 요리 실력, 담력, 인내심도 없는 한 엄마는 겨우 가을 바람에도 어깨를 움츠리고 하염없이 떨고만 있다.

 

   
 
김혜율 (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두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3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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