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영 신부] 11월 9일(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에제 47,1-1.8-9.12; 1코린 3,9ㄷ-11.16-17; 요한 2,13-22
오래전에 루돌프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은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대해 철학적 접근을 하면서, 신성의 깊이에 있는 비합리적 요소 혹은 초합리적 요소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단순하게 성스럽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단순한 원의를 가지고 읽어 내려갔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뒤, 저는 성스러움의 의미를 한 편의 시에서 발견합니다. 그 시를 통째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한 겨울 서울역 앞, 지하보도에서 30대 초반의 한 여자가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런데 죽어 있는 그 여자가 헌옷으로 무언가를 싸서 꼭 안고 있었고, 사람들이 그 옷을 벗겨 내자 그 안에는 한 살 정도 되는 어린 아기가 있었다. 그 아이는 살아 있었고 편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성스러운 것이 이것이구나
그런데 그 시의 제목이 “성의”(聖衣)였습니다. 날이 추워 자기가 입던 옷을 벗어 아기를 덮었던 엄마의 옷이 성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의 내용도 그렇지만 시의 제목이 가슴에 서늘하게 와 닿았습니다. 그렇구나, 성스럽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아기가 춥지 않게 하려고 자기 옷을 벗는 것”,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는 죽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는 것”이 성스러운 것이구나. 이 시는 저에게 성스러움의 첫 기억을 새겨 주었습니다.
그 후, 예수회에 입회하고 기도, 삶의 성찰을 통해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성스러움의 의미를 넓혀갔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성스러운 것(성체)은 그분은 죽고 사람을 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성스러운 것(성경)은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이고, 교회 건물이 성스러운 것(성당)은 바로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지성소가 있고, 하느님의 삶과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이야기인 구약을 읽고,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드리고 하느님께 기도 드렸던 곳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만나 인간이 정화되고, 하느님께 인간의 고통과 비참함을 하소연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힘을 얻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의 장사치들과 환전꾼들을 몰아내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고 하십니다(마르 11,15-17 참조).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강도들의 소굴로 변했다면 그곳은 더 이상 성전이 될 수 없는, 더 이상 하느님이 중심이 될 수 없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슬픈 상상, 서울역 지하보도에 계신 하느님

성전에 하느님이 계시지만, 그분 홀로 계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크고 화려한 그곳에서 편히 계시기보다 사람들을 찾아 나서실 것 같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집(마음)으로, 이 시대의 아픔 한가운데로, 아이들을 잃어버리고 울부짖는 어미의 가슴팍으로, 그들과 함께 아픔을 겪고 있는 거리의 미사로, 제주 강정의 흙먼지 날리는 제대로.... 그곳에 하느님이 계시기에 바로 그곳이 성전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늘 둘째 독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7)이라고.
성스러움은 그저 화려한 성당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옷을 벗어 헐벗은 이를 덮어 주는 손길에, 너 먼저 배 밖으로 나가라고 손짓하는 선생님의 소리에, 죽임을 살림으로, 거짓을 진실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어가는 삶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 시대의 십자가의 죽음과 죽임의 자리에 생명의 물줄기를 대는 이들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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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성소 담당, 청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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