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영 신부] 10월12일(연중제28주일) 마태 22,1-14

미국 애틀랜타에 있는 한인 본당에서 보좌 신부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2년이 지나도록 한국에 들어올 기회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국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어머니는 저에게 언제 한국에 들어오냐고 물으셨어요. 3년이 지나야 한국에 갈 수 있을 거라 말씀드리자, 어머니께서 긴 한숨을 쉬시면서 “아이고, 아무리 우리가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지만 얼굴은 보고 살아야지....” 어머니의 신앙관으로 볼 때 하늘나라는 먼 훗날 죽은 다음에야 가는 것이고, 지금 살아있을 때 아들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죽고 나면 아들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아들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것이 어머니의 바람이었던 거지요.

하늘나라는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어떤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가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 이러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회당에서 읽었던 이사야 예언서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6-20 참조) 해방과 자유의 나라,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나아가 예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가 지난 2000년 동안 존재해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늘나라는 죽은 다음에야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시작되는 현재 진행형의 나라입니다.
 

▲ 회당에 있는 예수. 니콜라이 게(1868)

어떤 신학자에 의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폭행을 당해 왔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정의나 평화 그리고 사랑을 추구한다면, 이 세상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전쟁과 파괴의 역사였고, 정의가 아닌 불의가 판을 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에 지금도 교회는 세상을 향해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반복음적이고 반생명적인 세상의 가치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어떠한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대학생으로부터 이런 글을 받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대학 생활을 하고, 소위 스펙을 쌓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삶에 대해 많은 의문을 느낍니다. 이것이 진정 나를 위한 삶인지, 아니면 단지 남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보여주기 위해 사는 삶은 아닌지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누구나 살고 싶은 세상이 있을 것인데, 적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하느님이 없는 세상)이 요구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나 싶습니다. 아니 세상이 요구하는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이 때론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이 세상이 요구하는 조건에 나를 맞춰가며 그럭저럭 살아갈 것인가? 어떤 길이, 어떤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진정 나답게 살아가는 길일까?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한 이야기입니다. 풍요로운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 하지만 어떤 이는 밭을 갈러 나가고, 장사하러 가고, 또 어떤 이는 초대장을 갖고 오는 이를 죽이기까지 합니다. 우리에게 밭을 갈고 장사를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지만, 오늘 복음의 문맥 안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이 아닌 다른 형태의 삶이라 생각됩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의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는 이(왕의 종들)를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 시대의 자유와 평화, 정의와 진실의 삶을 살도록 외치는 이가 바로 이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저 멀리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 세상 종말 즉,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날에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각자의 삶의 끝자리에서 일어나겠지요. 또한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나의 삶도 마찬가지로 아직은 끝나지 않았고,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 더 걸어가야 할 길이 남아있는 거지요. 걸어가는 동안 복음적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삶, 바로 거기에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겠지요. 오래전에 읽었던 글이 하나 생각납니다.
 

아직과 이미 사이

 - 박노해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최성영 신부 (요셉)
예수회 성소 담당, 청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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