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두 편의 ‘역사’ 소재 드라마가 월화 같은 시간대에 맞붙었다. 분명 치열한 ‘전쟁’ 상황인 건 확실한데, TV로 시청하는 ‘구경꾼’들에게는 기대만큼 관심을 못 받고 있다. 갈수록 어딘가 맥이 풀리고 있는 MBC '야경꾼 일지'와 SBS '비밀의 문-의궤 살인사건>'얘기다. 둘 다 ‘조선’ 시대의 왕이 주인공이다. 하나는 판타지 장르, 하나는 팩션 드라마를 표방한다. 어쨌든 정사(正史)가 아니니 그저 드라마로서, 이야기로서 보라는 뜻이다.

왕과 왕의 아들들과 대신들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특징은 모두 미치거나 미쳐 가는 상태라는 점이다. 혹은 미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중이다. '야경꾼 일지'에서는 왕궁이 귀신에 씌었고, '비밀의 문'에서는 선왕을 죽이고 ‘살인자들’끼리 맺은 ‘맹의’라는 사악한 과거사가 있다. 왕권 유지와 승계 혹은 찬탈, 음모와 배신, 빼앗긴 왕위 회복 등을 둘러싼 암투가 주요 뼈대다.

두 드라마 모두 캐스팅이 화려하다 못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조연 주연을 가릴 것 없이 대단한 명배우들과 스타들의 포진이다. 방영 초반 첫 주에는 둘 다 단연 화제였다. 워낙 스타들이 포진한 기대작이었고, 1,2회에서 보여 준 서사 구조는 꽤 흥미로워 보였다. 문제는 이후였다. 어쩌면 발상은 좋았는데 과정을 이끌어 가기엔 역부족이었던 듯도 하다. 내용상 등장인물들끼리는 날마다 혈투를 치르는데, 극의 긴장감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반응이 그리 좋지 않으니 두 편 모두 피투성이가 된 채 내부 사정만 어수선해지고 있다. 안타깝다. 배우들의 혼신의 연기력과 스타성으로도 메울 수 없는 구멍들이 너무 큰 것일까.

‘야경꾼 일지’ 저주가 실체를 얻고 역사가 될 때

사술(邪術)이 왕을 지배한다. 사람과 귀신이 싸우고 악령과 염력이 인간사와 충돌하는 ‘스펙터클’한 싸움과 전쟁의 난무가 펼쳐진다. '야경꾼 일지'에서는 이 싸움에서 활약하는 그러니까 정의의 용사들을 ‘야경꾼’이라 부른다. 굵직한 사극을 여럿 쓴 유동윤 작가와 2010년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전에 당선한 원안 작가 방지영의 협업의 산물은, 그런데 어쩐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게 한다. 극중 국가 ‘조선’은 자연 현상의 어떤 ‘틈’과 사악한 기운이 만난 틈바구니에서 ‘탐욕’으로 인한 살생의 기운에 장악된다. 천지가 피로 물들었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 '야경꾼 일지'의 한 장면.(사진 출처 = MBC'야경꾼 일지'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일식(日蝕), 어디선가 날아온 불덩이들, 검은 연기, ‘용신족’과 그들이 섬기는 이무기, 마마신, 마고족, 무녀.... 판타지의 익숙한 도구들이 수시로 출몰해 겁을 준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실, 사람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누가 악령에 사로잡힌 자인지 모르기에 무섭다. 심지어 악령에 사로잡힌 게 뻔한 왕 해종(최원영 분)을 보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그의 말도 안 되는 폭정을 감당해야 하고 살인 명령들을 저지하지 못하는 현실이 더 끔찍했다.

어린 ‘대군 아기씨’는 죽음의 고비들을 간신히 넘겨 십 수년 후 장성한 월광대군(정일우 분)으로 극의 중심에 선다. 실종된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존재와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다. 궁궐 분위기나 해종의 돌변은 어딘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떠올리게 한다. 인자한 아버지였던 햄릿의 부왕과 형을 죽인 ‘잔인무도’한 숙부 클로디어스, 덧붙여 햄릿이 만일 즉위에 성공했을 경우의 ‘실성한 폭군’을 모두 섞어 놓은 듯한 삼중의 인격이다. 어쩌면 한 사람이 왕좌에 앉아 보여 줄 수 있는 스펙트럼 전체를 다 보여 준다. 자나 깨나 환청에 시달리고, 매 순간 의심과 고통뿐이며 모든 판단과 행동은 머릿속을 지배하는 악령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왕이다. 해종은 악령들에게 이용된 존재일 뿐이었다.

덴마크의 왕이던 햄릿의 아버지는 숙부가 자신을 살해했다고 유령으로 국경에 나타나 호소했다. 아버지는 만천하에 울리는 소문의 메아리로서 아들에게 복수를 명령한다. 세상이 온통 아버지의 망령과 소음으로 가득했다. <야경꾼 일지>의 후손인 ‘야경꾼’들에겐 강력해진 악의 무리와의 힘겨운 대결만 남았다. 용신족의 사담(김성오 분)은 마마신을 조종하며 조상헌(윤태영 분)과 무석(정윤호 분) 등을 위협한다. ‘조선의 왕’만이 쏠 수 있는 화살로 쏜 이무기를 전리품으로 박제시켜 궁궐 지하에 둔 아버지 해종. 아버지가 후세에 남기고자 한 그 ‘치적’의 결과물 이무기는 깨어나고 사담은 ‘승천 의식’을 성공시켜 영원히 저주를 실체로 만들려 한다.

문제는 갈수록 위기나 해결책이 모두 판타지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초반에는 끔찍하고 무서웠는지 몰라도 이제는 싱겁고 허무하다. 어린이들이 보는 판타지물과 과히 달라 보이지 않는 급반전도 자주 등장한다.

‘비밀의 문’, 편년체 서술을 벗어나지 못하는 ‘비밀’

'비밀의 문-의궤 살인사건'은 정말 으리으리한 출연진을 자랑한다. 그런데 비밀이라면서 세상 모두가 안다. 영조(한석규 분)가 경종을 어떻게 했으리라는 추정 말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뒤에서는 다 수군댄다. 세자(이제훈 분)만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힘도 없으면서 세자는 부왕과 맞서려 한다. 너무 순진하거나 무모하거나 어리석다. 세자는 이름처럼 ‘선’하기만 하고 다른 능력이나 섬세함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의명분만 강조하는 그의 완고함은 나이든 아버지를 능가한다.

이 부자 사이의 적대감은 익숙하면서 어색하다. 세자는 거침없고, 왕은 모사꾼 같다. 왕은 매 순간 둘러싸인 신하들에게 협박과 주의를 받는다. 그 어떤 사슬 혹은 악의 기운이 왕을 칭칭 감고 있는 듯하다. 그에 비해 세자는 자유롭고 떳떳하다. 이 관계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연상시키는 점이 있다. 혹은 영조, 사도세자가 아니라 얼핏 단종, 수양대군을 연상시킨다. 세자가 젊은 국왕이고 영조가 왕위 찬탈을 노리는 삼촌 같다. 아버지가 영민한 아들을 다소 경계하면서도 결국은 사랑하고 왕위를 물려주려 애쓰는 ‘예상된’ 자연스런 부자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 '비밀의 문'의 한 장면.(사진 출처 = SBS드라마'비밀의 문'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세자가 부왕에 대해 최소한의 우위를 점하려면, 추악한 비밀을 아는 정도로는 안 될 듯하다. 부왕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 곧 죽은 형 경종의 유령이라도 빙의 돼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죽은 경종의 원혼이 영조를 조종하여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불러들이는 식이어야 할까? 어쨌든 느닷없는 광기 따위에 의지해 풀어 나가기엔 극의 스케일이 지나치게 방대하다. 게다가 극을 극답게 만드는 건 ‘사건’의 참혹함이나 크기가 아니다. 집요한 수사진의 범인 추적 과정이 아니다. 뭔가 좀 더 치밀하게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비밀’과 ‘과거’가 제대로 값어치를 할 듯하다. 게다가 신흥복이라는 ‘백성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을 강조하는 세자의 대사와, 감추려고만 드는 병조판서 홍계희(장현성 분)의 이분법처럼 극은 자꾸 이분법을 강조한다. 극이 입체가 되기 어렵게 말이다. 너무나 어린데 터무니없이 중요해 보이는 배역 지담(김유정 분)도 부담스럽다. 세자와 (우연히)연애라도 하게 될 것 같은 분위기는 극의 기둥 줄거리마저 방해한다.

세월호 침몰의 책임자로 ‘추정’되는 유병언 회장을 잡기 위해 투입된 경찰병력이 170만 명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수사과정이 ‘극적’이거나 ‘서스펜스’ 등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다. 보여 주기식 규모가 ‘흥미’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아쉽다. 각 배우들의 존재감은 엄청나다. 자기가 출연한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연기력만큼은 대단하다. 저 배우가 저 인물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듯해 보였다. 그러나 초반임을 감안해도, 극이 어딘가 ‘편년체(編年體) 서술’식의 김빠진 구조를 유지하는 건 안타깝다. 다들 답과 과정을 알고 있는 듯한 저 태연함과, 세자만 모르는 과거를 수군거리는 저 안일함으로는 그 어떤 추적도 어려울 듯하다. 궁금하지도 무섭지도 않은 살인 사건의 배후 뒤로, 남은 것은 어쩐지 조선조 희대의 ‘미친’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낱낱이 광기의 대사들로 이어가게 될까 우려된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실성의 실감도를 보여 주는 쪽으로 기울어가는 건 아닐지. 미친 왕의 모습이라면 극 속에서 이미 많이 보았다. 문제는 ‘비밀’이 아니듯 배우의 존재감도 광기 열연은 아닐 터이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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