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 '군도'에 등장하는 조윤(강동원 분).(사진출처 = '군도' 홈페이지)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가장 돋보이는 이는 조윤(강동원 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배우 강동원은 그야말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닌듯한 아름다움마저 품고 있었다. 그의 아름다움을 깨뜨리지 않기 위한 치밀한 미장센과 감독의 ‘고집’까지 느껴지는 장면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려운 아름다움이었다. 아무도 꺾을 수 없고 아무도 훼손시킬 수 없는 강자의 아름다움. 대적할 수 없는 고수의 자신감. 그를 꺾을 자는 조선 팔도에 없었다. 조윤을 꺾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조윤 자신뿐이었다. 그의 내면이 스스로 흔들리고 붕괴되지 않고서야 남의 칼에 베일 리 없었다.

“죄책감 같은 걸 느끼진 않는가? 도살하기 전에 소의 눈을 보면 도살하기 어렵다고 하던데. 여태껏 가축만 죽였는가?”

백정 돌무치(하정우 분)가 조윤 앞에 엎드려 들은 말이었다. 이 제안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었다. 앞으로 죽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가능성 타진이었다. 섬뜩하지 아니한가. 내가 이제껏 해온 일들로 인해 나는 다른 ‘가능성’의 대상이 된다. 그 쓰임은 위에서 결정한다. 멋모르고 돈 꾸러미에 혹해 조윤의 제안에 응했다가 곧 후회하며 살인만은 못하겠다고 거절했던 도치(하정우 분)는 식구가 몰살당하고 자신도 죽다 살아난 후에야 깨닫는다. 높으신 분들 앞에서 감히 ‘무르자’고 했던 게 착각이었다. 그 제안은 ‘선택’이 아니었다. 명령이고 강요였다. 수행을 해도 못해도 돌아올 죽음은 피하기 어려웠다. 민초의 삶이란, 상층부의 비밀에 접근하는 것 자체로 일가족 몰살 감이었다.

쌀, 누군가에겐 도구, 누군가에겐 목숨

999섬의 쌀가마를 가진 자가 숫자 1000을 채우려는 욕망은 집요하다 못해 귀기(鬼氣)가 서려 있다. 조윤의 아름다움은 거기서 기인했다. 어차피 쌀 한 섬은커녕 한 됫박도 제 것으로 못 가져 본 힘없는 민초들이야 그 탐욕을 헤아릴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빼앗기고 당할 뿐이다. 그런 탐욕의 광풍이 내가 사는 곳에는 미치지 않기만을 빌며 숨죽여 살아야 한다. 그 피비린내 나는 바람에 발이라도 걸리는 날엔 뼈도 못 추릴 것이기 때문이다.

▲ '군도'의 도치(하정우 분).(사진출처 = '군도' 홈페이지)
나주 대부호의 서자로 조선 최고의 무관 출신인 조윤은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양민을 수탈해 삼남 지방 최고의 대부호가 된다. 사람의 피와 눈물을 갈아서라도 쌀독을 채우려드는 부자의 맹목성 혹은 ‘거지 근성’에는 바닥이 없었다. 영화 <군도>의 배경은 양반과 탐관오리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던 조선 철종 13년이다. 세상은 캄캄했지만 힘없는 백성의 편이 되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적떼 군도(群盜), 지리산 추설이 있었다. 백정 돌무치는 죽어도 잊지 못할 원한에 사무쳐 군도에 합류한 뒤 ‘형제’의 의례를 치르고 ‘도치’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조윤의 아버지 조 대감(송영창 분)은 물론이고 당대의 양반과 탐관오리들은, 사람 머리를 다 쌀가마로 모든 땅은 곳간을 채울 수단으로 밖엔 안 보았다. 지배층에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도 끝도 없이 채워야 할 쌀독, 쌓아 올려야 할 곳간의 천장만 드높았다. 만족이란 있을 수 없었다. 곳간은 얼마든지 더 지을 수 있으니까.

우리는 누구의 후손인가?

영화 <군도>는 정의롭고 신출귀몰한 ‘군도’들의 캐릭터 하나하나를 공들여 보여준다. 그들의 활약은 눈부시고 형제들에 대한 의리와 애정은 돈독하다.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대호(이성민 분), 땡추(이경영 분), 마향(윤지혜 분)은 물론이고 수많은 군도의 일원들 그리고 끝내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김성균까지 모든 배우들이 관객의 마음을 두드린다. 잊혀지지 않을 배역들이었다. 용감하고 장하게 자신의 시대와 운명과 맞섰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끝내 당당했고 영화는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서는 서부 영화보다 더 기막힌 액션 활극과 판타지가 등장하는 '호쾌한’ 엔딩을 펼친다.

그럼에도 애잔하다. “뭉치면 백성이고 흩어지면 도적”이라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생존비결을 관객의 뇌리에 각인시키긴 하지만, <군도>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준다. 특히 교수대에 군도의 무리가 잡혀 올라갔을 때, 그들의 핏줄 하나까지 느껴지는 듯한 가슴 먹먹함은 압권이었다.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서러웠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결국 우리의 조상들은 셋 중 하나였을 것이다. 백성을 참형시키는 자, 참형을 당하는 ‘순교자’, 마지막으로 가족과 형제들 그리고 이웃들이 죽어 나가는 순간을 눈앞에서 뻔히 지켜보면서도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수많은 군중.

▲ 영화'군도'의 한 장면.(사진출처 = '군도' 홈페이지)

영화 <군도>는 관객을 위한 서비스 같은 그 화려한 결말부에도 불구하고 미완의 이야기다. 그리고 황혼의 석양 정도로는 달랠 수 없는 비감과 함께 수많은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벗어날 수 없는 질문이다. 우리는 누구의 후예인가? 이 참혹한 역사는 정말 과거의 일이며 영화 속의 이야기일 뿐인가? 우리는 여전히 셋 중 하나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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