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역사를 읽을 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해석뿐일지 모른다. 사극(史劇)이 변형시킬 수 있는 틀과 폭도 과정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고작이라고 말하지 말자. 그래도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시대마다 역사의 해석은 새로이 읽히기 마련이고 하려는 이야기에 따라 사극의 전개는 딴판이 될 수 있다. 비록 ‘결말’은 바꿀 수 없을지라도 이야기의 과정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리 느껴진다. 살고 있던 사람들이 달라진다. 사람들이 꾼 꿈의 방향이 전환된다.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가능성으로 재탄생되기도 하며 사람들의 가슴에 씌어지지 않은 역사로 남아 흐르기도 한다.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 꾸준한 입소문에 힘입어 850만을 넘어섰다. 지난 여름 <명량>이 신기록의 위업을 달성하며 극장을 싹쓸이하고, <군도>와 <해무> 등등 개봉 전부터 기대가 컸던 대작들의 틈새에서 거둔 놀라운 성과다. <해적>을 ‘고래 싸움에 낀 새우’인 줄 알았던 개봉 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수면 아래에서 판을 뒤집으며 솟구쳐 오른 고래를 몰라봤던 것이다.
처음에는 다들 이 영화가 가진 힘을 예측하지 못했다. ‘코믹 SF 사극’을 표방하며 관객을 웃기겠다고 작정한 영화라 과소평가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웃기고 배꼽 잡게 하고, 시간 보내기 아주 좋은 여름용 상업영화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뭔가 뭉클한 것이 있다. 우리가 놓쳐 버린 줄 알았던 어떤 것이 분명 펄펄 살아 있는 생명력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웃다가 극장 밖으로 나오고 나면 그때부터 마음속에서는 묘한 파도가 출렁이기 시작한다. 신기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은 조선을 위함이야.”
<해적>은 이야기의 발상 자체가 흥미롭다. 위화도 회군으로 숱한 ‘형제’들을 죽이며 피로써 정권을 잡은 이성계(이대연 분)는 명나라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부여해 줄 국새와 국호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명 황제에게 국새를 받은 한상질(오달수 분)은 새로운 국호 ‘조선’과 국새를 갖고 돌아오는 길에 고래의 공격을 받아 배는 난파하고 국새를 잃어버린다. 국새는 고래가 삼킨 듯 보인다. 이 또한 고래가 일으킨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환상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국새는 고래가 숨 쉬는 그 장관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 누구도 고래를 제대로 본 적 없는 산적들과 그저 쫓기고 오갈 데 없어 바다에서 서로 의지하고 살아온 영화 속 해적들은 졸지에 고래를 잡지 못하면 일망타진시키겠다는 관군의 폭압적 추격 아래 놓인다. 그들이 이 작전에 뛰어들지 않으면 무고한 백성들이 ‘해적과 내통’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무참히 죽어나간다. 가담하지 않으려고 해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이미 제어 장치가 망가진 거대한 ‘물레방아’는 민가와 사람들을 깔아뭉개며 미친 듯이 구르기 시작했다. 산적의 대장인 ‘송악산 미친 호랑이’ 장사정(김남길 분)과 해적의 두목 ‘용왕님의 큰 딸’ 여월(손예진 분), 좌절된 욕망을 반드시 실현시키려는 모흥갑(김태우 분)과 바다의 불사조를 꿈꾸는 소마(이경영 분)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운명의 대결을 치러야 한다.
과연 고래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고래를 잡기만 하면 형제들과 ‘소중한 사람’과의 미래는 지킬 수 있는 것일까? 인연과 악연, 오랜 구원(舊怨)과 소중한 이들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 충돌하는 격렬한 해상 전투들이 오직 고래를 명분 삼아 펼쳐진다. 모든 것은 고래가 나타나 줘야만 비로소 선명해질 것이었다.
함께 소리 내 웃는 극장 관람의 원초적 재미

왜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재미있는 것일까? 함께 소리 내어 껄껄 웃고 함께 웃다 숨넘어가는 탄성을 같이 지르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오래 잊고 지냈다. 방해는커녕 이처럼 흥분되는 경험이었음을 굉장히 오랜만에 느꼈다. 극장에서 우리는 가슴 벅차게 고래를 만났다. ‘이야기’의 힘이 용오름으로 하늘과 바다를 잇는 순간을 목격했다. 우리가 배운 옛 역사의 결말이 바뀌지는 않았을지라도 고래가 한 번 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았다. 우리가 잊지 않고 있는 한 우리가 여전히 바다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한, 고래는 그렇게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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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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