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생부(生父)라는 개념 혹은 존재가 없었다면 그녀와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캐나다에서 살던 대로 살았을 것이다. 비록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지라도 아들과 둘만의 시간에 오히려 더 집중하지 않았을까. 그게 더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무리가 아니었을까. 말기암의 몸을 이끌고 굳이 낯설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가족’ 만들기 작업으로 몸을 혹사시키며 극심한 스트레스와 통증에 시달리는 선택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아들? 평생 버림 받았다는 분노를 상처로 키운 자기 자신?

생물학적 아버지가 ‘간절’하고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는 풍토라면 이런 드라마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심지어 생부라는 명분은 거창한데 그 아버지라는 존재가 허명(虛名)으로 남아도 방조하는 법과 제도가 상존하는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 같다. MBC 주말극 ‘마마’는 한 마디로 60년대 식 ‘미워도 다시 한 번’ 류의 2014년 버전에 가깝다.

극한 상황에서만 빛나는 모성애?

모든 것을 잃으면서도 아이를 택했던 한 엄마가 있다. 한승희(송윤아 분)는 타국에서 아이를 키우며 화가로도 성공했는데 어느 날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한국에 돌아온다. 이유는 단 하나, 13년 전 헤어진 옛 애인을 만나 아들에게 ‘아빠’를 찾아 ‘가족’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당연히’ 아들의 생부에게는 아내와 딸이 있다. 그야말로 모성애의 지고지순함과 새로 발견된 부성애의 각성, 그 과정의 눈물의 홍수가 기획의도였을 것이다.

▲ 한승희(송윤아 분) 와 아들 그루(윤찬영 분)가 병원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엄마인 한승희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사진 출처 = MBCdrama 마마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그런데 우선 주인공 한승희의 자체적 모순이 있다. 그렇게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해 부와 명성을 거머쥔 여성이 남은 삶이 6개월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갑자기 ‘60년대’로 돌아간다는 게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승희의 경력이나 혼자 힘으로 아들 그루(윤찬영 분)를 잘 키웠다는 사실은 부러운 일일 수 있다. 재능을 해외에서까지 인정받으며 자유롭고 멋지게 살았을 법한 여성이, 갑자기 흑백TV 시절 종부(宗婦) 스타일의 인습의 굴레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셈이다.

엄마의 사랑 속에 풍족하게 자랐을 성 싶던 잘생긴 아들은 돌연 ‘결손’과 ‘결핍’의 세월을 보낸 듯한 ‘과거사’를 들먹이며 엄마와 불소통의 시간을 보낸다. 승희의 아이가 아들이고 옛 남자 문태주(정준호 분)의 아이는 딸이라는 사실 때문에 드라마의 모든 인물은 ‘대를 이을 아들’이라는 종갓집 스토리의 귀결에 집착한다. 주인공 승희는 그 임무의 완성이 생의 완성인 듯이 군다.

출생의 비밀과 병을 아들에게까지 숨기며 승희는 드라마가 중반을 넘어서도록 ‘까칠한’ 작가로 살았다. 패션 감각 뛰어난 그녀의 아름다움이나, 연하의 남자친구 같은 ‘현대적’ 코드는 배경이 2014년임을 줄곧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막판까지 드라마는 공허했다. 말싸움이 지나치게 많았다. 게다가 의외로 그루와 엄마의 사이는 별로 튼튼하지 못했다.

이 모성은 시초부터 심각한 상처와 결핍을 안고 있으며 아들이 성장하는 동안 내내 세상으로부터 다치고 숨고 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는 식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자관계는 기우뚱하다. 그렇게 상처받아 뒤틀린 모자 관계를 참 실현되기 어려운 ‘새로운’ 가족 관계 속에 편입시켜야 한다. 타인의 죄의식과 배신감을 기반으로 해서 말이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태주와 한 동네 살다 보니 그만 그의 아내 지은(문정희 분)과도 친구가 된다. 문제는 등장하는 여성들이 주체적이며 생활력 강하다 보니 남자 주인공 태주의 역할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는 도구적 인물로 그친 듯하다. 승희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들을 품어야 한다는 결말이 뻔히 정해져 있다 보니 결국 태주는 극의 전개와 시청률을 위해 작위적이 됐다. 외도도 저지르고 이 여자 저 여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오래 방황했다. 그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는커녕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미숙한 상태였다. 성공이라는 명분에 떠밀려 사랑을 버렸는데 심지어 성공도 못했다. 무한히 흔들리고 떠 있는 중인데 이런 사람을 두고 승희 모자가 귀국과 편입을 결심했다는 것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는 여기 등장하는 모든 여자들과 관련이 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그렇다고 본인이 행복하거나 성공한 것도 아니다. 사람이 너무 망가졌다.

▲ 한승희(송윤아 분)와 아들 그루(윤찬영 분)가 오토바이를 타면서 즐거워하는 모습. (사진 출처 = MBCdrama 마마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태주가 자신을 추스르고 아이와 아내, 옛 애인, 가족 모두와 진심으로 화해하지 않는 한 이 드라마는 따뜻한 휴먼 드라마로 갈 수가 없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의 씨앗과도 같은 태주가 가장 혼란에 빠져 있고, 자기 정리가 안 돼 있는 점이다. 그래서 다들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고 거짓으로 숨기는 역할놀이만 반복한다.

승희의 남자친구 지섭(홍종현 분)은 이런 튼튼하지 못한 아들과 엄마와의 관계, 생부와의 불편한 관계에 끼여 있는 사람이다. 엄마와 아들이 허약한 관계이다 보니 지섭과의 사랑도 지지부진하다. 승희 자체가 사람에 대해 ‘애착’관계 형성에 문제가 있다. 아들을 깊이 사랑해야 지섭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뻔히 정해져 있는 결말 때문에 지섭이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하다.

태주는 갈수록 여자들 사이의 분란과 갈등, 불행을 만들기 위한 캐릭터로만 부각되고 있다. 심지어 태주만 아니라면, 모든 여자들이 ‘자매애’를 누리며 아이들을 공동 육아하면서 행복하게 살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실은 드라마의 핵심이 태주와 그루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성장하는 데 있을 듯한데, 그 성장을 결말부의 ‘폭풍 눈물’을 위해 아끼고(?) 지연시키다 보니, 태주를 도구적으로 소모하게 된다.

태주의 ‘아버지로 서는 과정’을 진지하고 따뜻하게 접근하기에도 장애물이 많다. 그에게는 ‘조강지처’ 지은과의 해결되지 않을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모성애와 부성애를 강조하지만 결국 결론은 인습적 가족관를 옹호하며 ‘다른 여인’의 희생을 강요하게 될 듯하다. 그리고 정말 피곤하게도 모성과 부성은 꼭 극단적 상황에서만 작동하고 있다.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와 잔인한 운명의 독배를 아니 마실 수 없는 설정에서만 가족애는 강조될 것이다.

일상이 없는 사랑의 공허함

시청자들도 ‘현대인’이라 신파적 상황을 못 받아들일 테니, 극은 자연히 우연에 기대고 진실이 발각될까말까 줄타기만 하다가 이제는 대놓고 싸워댄다. <마마> 속에서 의외로 그루와 엄마의 사이는 비밀도 많고 상처도 많은 관계다. 이 불행을 어쩌지 못하고 자꾸 숨기는 듯하다. 아이 생부 태주와도 갑자기 어린 아들을 놓고 물건 다루듯 우왕좌왕하는 모양새였다. 이 상황의 종지부를 찍어줄 이는 느닷없이 ‘아들’을 새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은인가?

엄마와 아들, 사랑할 시간이 별로 없다. 제삼자가 심지어 생부라도 감히 끼어들거나 간섭할 수 없는 그런 애틋함으로 시청자를 울리고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갈등을 위한 갈등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과감히 접고, 이 상처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후회하지 않도록 충분히 사랑하고 아름답게 헤어질 준비를 했으면 한다. 더 많이 위하고 아껴주는 것 밖에 없을 텐데, 그러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말이다. 일상은 없고 극한 체험만 있는 드라마 속 가족 관계가 볼수록 서글프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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