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12]

열어 놓은 창문으로 비가 하염없이 오는데 이중창, 삼중창도 아닌 한 십중창 정도 되는 벌레들의 합창 소리가 빗소리를 배경으로 계속 변주 중이다. 그중 한 벌레 소리가 내 귓가에 대고 바로 울리는 듯 가깝고도 가까워 굳이 살피지 않고도 알겠다. ‘저쪽 거실 구석 어딘가에 귀뚜라미가 들어왔는데 여기가 어딘가 하며 낯설어 더 크게 목청껏 우는 거겠지. 여기 홀로 불 켜고 앉은 사람한텐 감히 다가 올 생각도 못하는 풀벌레일 뿐이니까….’ 하면서 나도 마음을 굳게 먹는다. 왜 이 시점에서 마음을 굳게 먹는가하면 나는 마음이 초파리 한 마리에도 흔들리고 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략 한 달 동안 나를 대량 살육자로 만들었던 산모기 떼의 면면에 대해선 아예 입을 열고 싶지가 않다(아주 험한 욕이 랩으로 준비 돼 있다). 파리한테는 모기보다 감정이 더 상했다. 처음에 파리를 대할 때는 ‘너 아직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구나, 내가 몇 십 년 동안 너의 존재를 잊고 살았네’ 하며 바보같이 굴었다, 하지만 파리는 정말 상종할 가치가 없는 벌레였다. 굉장히 성가신 건 말할 것도 없고 비위 상했고 때때로 사람을 공격하며 약 올리기까지 했다. 나중엔 ‘이게… 이게… 미쳤나? 어디 한번 오늘 너 죽고 나 살자. 이 똥파리 놈들’, 이러면서 파리채를 마구 휘두르면서 반은 광분, 반은 공포심으로 이들 똥파리를 히치콕 영화의 살인 새떼처럼 여기게 되고 말았다.

이곳에 상주하거나 스쳐 지나가거나 하는 벌레의 개체 수와 다양성은 상상 초월이다. 왜 우리 집 거실 한가운데에 청개구리가 출몰하는지, 사마귀는 왜 나랑 싸우려고 그 손을 거두지 않는지(도망갈 충분한 시간과 공갈 위협을 주어도 꿋꿋하게 복싱 자세 같은)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생겼고 나 혼자가 아닌 ‘더불어 같이’ 라는 주문을 묵주 기도하듯 외며 일상 속의 체념을 배웠다.

‘나방, 나비, 거미들아 오늘도 안녕? 아무렴 그래 이 집이 내 집이고 너네 집이다. 귀뚜라미여, 길을 잘못 들었구나, 마당으로 던져 줄 테니 토마토 밭에 가서 울어라. 벌아 벌아 말벌아, 너는 좀 나가 줘야겠다. 벌레 너! 너는 누구니? 멸종된 줄 알았는데 8년 만에 나타났다는 천연기념물 장수하늘소랑 똑같이 생겼잖아, 우리 집에 많은데…. 산림청에 연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기까지면 나도 최대한 이해심과 인내심을 발휘해 살 수 있다. 어차피 이 시골집은 내가 아니라 메리와 욜라가 주인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밖에 글로 이름을 밝히기조차 힘겨운 벌레들 a, b, c가 있는데 남편 부재중에 혼자 이것들을 처리할 때면 나는 꼭 운다. 혼자선 어림도 없지만 모성의 힘으로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용기를 내 혼잣말을 계속 떠들다가 기합을 넣고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약도 뿌리고, 파리채로 내려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편이 들어오는 대로 내일 당장 여길 떠나자고 해야지’하며 이를 뿌득뿌득 간다.

하루는 옆 집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아기 엄마네(지금 우리 집) 전에 살았던 할머니가 어느 날 저녁에 우리 집에 뛰어왔어. 자려고 이불을 들쳤는데 뱀이 똬리를 틀고 그 안에 있었다잖어, 나중에 놀랄까봐 미리 일러두는 거여, 그러니 방충망 잘 하고 뒷문은 열어 놓질 말어.”

그리고 옆 집 할머니는 새끼 고라니를 집에서 키우신다. 집 뒤 편 텃밭에 놀러 나온 고라니를 생포하신 것이다(이것도 어디 법에 위배 되는게 아닌가 싶지만 할머니는 고라니 밥 주며 고이고이 키우신다). 우리 옆집 이장 댁은 비닐하우스가 멧돼지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되었다고 전기펜스를 설치해 가며 고구마를 지키고 있다. 어떤가? 이 정도다. 우리 동네 생태계의 현장은 살아 있으며 날 것 그대로이다. 청정지역에서만 핀다는 흰민들레도 이곳에서 처음 보았고 뱀 시체를 보려거든 윗집 할머니네 밭 어귀 길을 산책하면 된다.

 ⓒ김혜율
타샤 튜더라도 되어서 정원을 가꾸는 즐거움에 빠져 시골에 완벽히 적응할 것이라는 오래된 꿈은 허망하게 한 달도 안 돼 깨지고 말았지만 내가 이곳 시골서 5개월이 다 되도록 버티고 있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사람들만이 아니며, 사람 또한 대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겸손과 관용을 메리와 욜라가 자연 속에서 배우길 바라서이다. 욜라가 부러뜨린 방아깨비 다리가 몇 개 인지…. 메리는 어떤 이유로 죽은 벌들을 모아서 과자 상자에 넣고 보물처럼 대하는지 모르겠지만 문방구에 가면 잠자리채와 곤충채집상자를 사 달라고 하니 일단은 반갑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관성’ 때문이다. 어차피 지금 살고 있으니까 외부의 큰 힘이 주어지지 않는 한 그대로 그럭저럭 살아지고 있는 관성이 작용하고 있다. 뉴턴의 제1운동법칙의 보편성에 깊이 감탄하며 오늘도 벌레와의 동거를 감내하고 있다.

한 달여 전 마을 꼭대기 집에 사시는 은사님이 “어째 시골 살이 적응 좀 됐나요?”하고 물으실 때 “아니요…. 지금도 적응 중이에요” 했더니 실망을 많이 하셨다.

“여기서 적응 못하면 어디서도 적응 못해” 하시며 혼을 내셨지만 난 자신 있었다. ‘여기 아니고 벌레 안 나오는 데서는 얼마든지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요’ 하는.

하지만 벌레가 큰 원인이라는 것을 아시고는 이제는 볼 때마다 걱정이시다. 그럴 때면 “헤헤, 괜찮아요. 오전 중에 모기 서른 마리 쯤 잡았더니 이제 모기는 뜸해요. 파리는 백발백중이고요, 이번 가족 휴가 때 다들 벌레보고 꽥꽥 소리 지르는데 전 어깨에 나방 같은 거 붙은 건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툭 털어 버렸다니까요. 정말 의연하죠?” 하며 안심을 시켜 드리기에 이르렀다. 많은 발전이다. 벌레 포함해서 인간 외 타 생명체에 배타적이고 소심한 나 같은 인간으로서는.

우리 집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으러 놀러 오겠다는 많은 지인님들, 비 그치고 날 개는 가을로 다 예약해 드렸는데, 그때는 또 어떤 벌레들이 그대들의 다리를 기어오르고 옷깃에서 살짝 까꿍하며 놀래켜 드릴지…. “시골 사니까 좋아?” 하고 물을 때 제가 내쉬었던 가느다란 한숨이 그제서야 이해가 가실 거예요. 하지만 웰컴 투 마이 하우스! 놀러 오세요~. 밤 떨어질 때 다 돼 가니 밤 주우러들 오세요!
 

 
김혜율 (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두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3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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