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존 카니 감독, 2013년

뜨거운 여름 극장가에는 블록버스터의 향연을 보여 주는 그래프가 절정을 지나 아래를 향하며 슬슬 가을을 준비한다. 들뜬 한여름의 열기가 꺾이며 새로운 계절이 자리를 대신할 즈음에 우리는 스펙터클과 폭발력 있는 재미로 무장한 큰 영화들 사이에서 작은 영화, 일상을 담은 소박한 영화에 서서히 시선이 가기 시작한다. 한국영화 대작들의 틈바구니에서 단비처럼 잔잔하게 가슴을 적시는 영화 한 편이 조용하게 시작해서 입소문을 타며 관객을 감동시키고 있다.

로맨스가 그리워지는 가을이다. 여기에 꾸밈없는 포크락의 선율을 스크린에 한가득 담은 영화, 청춘들의 삶을 반영하는 영화 ‘비긴 어게인’이 작지만 강한 울림을 선사한다.

▲ <비긴 어게인>,존 카니 감독, 2013
‘비긴 어게인’이 조용한 돌풍을 일으키듯이 존 카니 감독은 처음에는 작게 개봉해서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져 많은 젊은이들을 열광케 했던 ‘원스(2006)’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아일랜드인이며 베이시스트 출신인 존 카니는 ‘원스’에서 음악적 영감을 가진 가난한 두 사람이 절박한 순간에 만나 하모니를 이루며 음악을 통해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이번에도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색깔로 자신의 스타일을 변주해 낸다.

‘원스’로 선댄스영화제를 통해 알려지고 아카데미상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존 카니는 할리우드로 입성했다. 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 캐서린 키너 등의 이름 있는 배우들이 출연하고, 인기절정의 록밴드 ‘마룬5’의 보컬 애덤 리바인까지 주요 배역으로 등장해 이목을 집중시킨다. ‘캐리비안의 해적’의 히로인 키이라 나이틀리가 싱어송라이터 그레타 역을 맡아 뛰어난 노래 실력을 보여 주며 관객을 놀라게 한다.

영국인 싱어송라이터인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는 남자친구 데이브(애덤 리바인)가 메이저 음반회사와 계약을 하게 되면서 뉴욕으로 옮긴다. 순수하게 사랑하고 함께 노래하는 것이 좋은 그레타와 달리 데이브는 성공을 맛보자 어느새 마음이 변해 버린다. 스타 음반 프로듀서인 댄(마크 러팔로)은 해고되어 자포자기한 채 뮤직바에 들른다. 그는 이곳에서 그레타의 자작곡을 듣게 되고 그녀에게 음반제작을 제안한다. 인생에서 최고로 절망한 순간에 만난 두 명의 패자는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합심하여 거리 밴드를 결성한다. 스튜디오에서 음반을 제작할 예산이 없는 그들은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 뉴욕 거리의 소음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며 진짜 삶의 노래를 만들게 된 것이다.

▲ <비긴 어게인>의 한 장면, 사진제공/(주)판씨네마

사랑을 잃어버린 여자와, 가족과 일을 잃어버린 자포자기한 남자. 두 사람이 각자 억세게 운이 나쁜 그 날, 영화는 각자의 시점에서 동일한 순간을 반복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점을 영화가 보여 주고 있다. 남자는 이 억세게 운이 나쁜 날에 찬란한 보석을 발견하고 희망을 다시 걸어본다. 이제 커리어를 시작하는 여자와 커리어가 끝장 난 남자가 만나서 만들어 내는 패자 부활전은 두 사람을 버린 사람들을 향한 복수혈전이 아니다. 두 사람은 성공을 위해서, 혹은 복수를 위해서 칼날을 갈며 내일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삶을 위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만들고 연주한다.

남자가 재능을 질투하거나 젊음을 착취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여자가 자신을 학대하거나 남자에게 집착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영화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여유와 위트가 넘친다. 사랑은 거들 뿐이다.

물질적 성공과 유명세에 대한 관심에서 거리를 둘 수 있는 저들의 삶이 어쩌면 팍팍한 우리네 삶에 비추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더라도 마지막까지 세속적 성공과는 상관없는 자신만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청춘이어서 희망이 전해진다. 말하지 못하는 언뜻 풍기는 로맨스도 각자의 자리를 위해 양보하는 착한 영화다. 삶에 녹아든 음악이 지친 마음에 커다란 위로를 준다. 그리고 이 순수한 희망이 우리에게도 전염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모든 것을 잃은 자들의 연대로 세상은 살만하다는 것을 느낀다. 찬란한 어느 한때를 잃은 사람일지라도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걸 일깨워 주는 것은 서로에 대한 연민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공감. 서로 다른 위치에 선 자들의 공감과 소통이 이다지도 어려움을 실감하는 요즘, 대한민국호가 계속해서 추락해 가고 있다는 절망감이 드는 요즘에 더욱 그렇다.

▲ <비긴 어게인>의 거리 밴드의 공연 장면,사진제공/(주)판씨네마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성취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작은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아름답다. 단, 그것이 양심에 따른 선택일 경우. 그레타와 댄이 마지막에 해내는 선택은 도덕적으로 올바르면서도 신난다. 이런 그들이 진짜 청춘이고 진짜 영웅이다. 지친 여러분에게 작은 위로가 될 영화라 강추한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동국대, 수원대 출강 중.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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