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김한민 감독, 2014년작, 7월 30일 개봉

지난 주 극장가에는 역사와 위인에 대해 진중히 숙고케 하는 바람이 거셌다. ‘명량’이 한국영화 신기록을 계속 갱신 중이다. 개봉일 최다 관객, 평일 최다 관객, 1일 최다 관객, 개봉 첫 주말 최다 관객 등. 그동안 ‘설국열차’나 ‘트랜스포머’가 지키고 있던 자리가 깨지는 걸 보니 과연 이순신 장군은 백전백승 명장이다.

2014년 여름 극장가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빅4가 대결하는 판을 깔아 줄 것이지만 이 대결은 싱거운 승부로 끝날 것 같은 기미가 보인다. 빅4 중 선방을 날린 ‘군도’가 일주일 천하로 내리막길인 반면 ‘명량’은 개봉 8일 만에 700만 관객을 끌어 모았다. 아마도 개봉 2주가 채 되기도 전에 천만 관객을 넘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만일 이 예상이 현실이 된다면 이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깨지기 어려운 기록이 될 것이다.

 
영화가 올림픽 경기도 아니고 무슨 무슨 기록 경신이니 호들갑을 떠는 게 우스워 보이기도 한다. 전 국민 다수가 일주일 동안 똑같은 영화를 보며 함께 울고 웃는 현상이란 일견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다이나믹 코리아’란 한 마디로 설명되는 유행을 쫓는 한국인의 특성을 비하하며 말하기 이전에, 대중문화의 특징과 현대 영화 시장의 특징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니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있네” 하며 즐겁게 바라보면 될 것이다.

크게 투자하여 매끈하게 잘 만들어서 남녀노소 전 관객을 끌어들여 크게 수익을 남기려는 것이 블록버스터의 특성이다. 이에 따라 극장가의 블록버스터 과열이 우려되는데, 이미 멀티플렉스 극장 개봉 현황을 보면 관객의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은 것은 현실이다. 개봉관이 많아도 대개는 큰 영화 두세 편만 편성되어 있다 보니 다양한 취향의 작은 다양성 영화들은 더더구나 관객을 만날 기회를 찾기 어렵다.

상영관 쏠림 현상은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늘 있어온 지적이지만 산업 규모가 세계 6위에 달할 정도로 영화 강대국이 된 한국영화 산업에서 대기업 계열 멀티플렉스 극장의 이윤 행위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이 와중에 반가운 점이 있는데, 관객은 정확하게 좋은 영화를 선별하여 본다는 것이다. 상반기에 남자 스타를 앞세운 대작 영화들 ‘역린’ ‘우는 남자’ ‘인간 중독’ ‘하이힐’ 등이 모두 만족할만한 성과를 보여 주지 못했던 것에 반해, 정공법을 선택한 ‘명량’의 성공 사례는 영화 창작자들에게 또 하나의 롤 모델이 될 것이다.

성웅 이순신을 그리다니, 따분하지 않을까. 혹은 고뇌하는 이순신을 보여 주겠다고 그의 숨겨진 이면을 드러낸다면 민족 영웅을 폄훼한다고 욕먹을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이순신 영화화는 힘들다. 이미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적 인물을 의무감에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을 터. 그래서 이순신을 소재로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150억 예산이라는 중압감은 또 어떤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명언에 걸맞게 망작의 향기가 피어오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긴장감 속에 ‘명량’이 개봉했다. 전작 ‘최종병기 활’로 스피디한 액션 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 영역을 보여준 김한민 감독은 ‘명량’에서 이순신을 둘러싼 장황한 이야기들을 버리고, 명량대첩의 현장, 그 한 곳을 집중 공략한다. 그리고 그의 의도는 적중했다.

명량대첩은 선조 30년인 1597년 9월 15일 이순신 장군이 단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선을 무찌른 전투다. 이 전투는 누명을 벗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 장군이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 지형적 환경과 치밀한 전술을 이용해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조선의 해상권을 회복한 사건이다. 고작 12척의 배로 330척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그 전술과 과정에 대한 기록이 분분하다. 영화 ‘명량’은 명량대첩을 최초로 영화화했다.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서 논리 구조를 탄탄하게 하여 설득력을 높이며 전쟁 액션 스펙터클을 더해 오락적 요소를 끌어올렸다.

 
영화는 명량대첩 8시간의 숨 막히는 전투를 61분간 지속되는 스펙터클 시퀀스에 담아낸다. 치밀하게 계산된 액션 동선, 그리고 조선 장군과 왜군 적장의 팽팽한 대결은 결과를 이미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긴장감을 던져 준다. 전쟁 리얼리티는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철저한 조사 및 지형, 날씨, 병력학, 당대 의상 및 생활 습관에 대한 고증 등 수많은 세부 조사들을 바탕으로 한다. 상영시간 2시간 중 1/2이 해상 전투에 총력을 가하는데 스펙터클로 팡팡 터지는 이 시간은 흥미 위주로 짜이거나 혹은 볼거리만 있어 지루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역경을 딛고 일어선 승리의 드라마가 있고 불가능한 현재를 뛰어넘는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으며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꾸어내는 연대의 고귀한 정신이 있다.

 
모두가 패배를 예견할 때 이순신은 지성, 인품, 철학, 냉철한 분석력, 강인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불가능을 이겨냄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 최민식은 가히 대배우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는 광화문에 동상으로 서 있는 화석화된 이순신이 아니라 아파하고 원망하며 잔인하기도 한 한 남자에게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를 완벽한 인간으로 우뚝 서게 만드는 것은 하나의 명제 때문이다.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쫒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선조와 원균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의 누명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었더라도 그의 충은 임금이 아닌 백성을 향했으므로 그는 다시 전장으로 나가 승리할 수 있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바다는 쳐다보기도 싫은 때 세월호를 집어삼킨 회오리 바다가 배경인 ‘명량’은 때를 잘못 만난 저주받은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힘 있는 자들이 배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 당연한 것인 양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현실에서 바다를 지키고 배를 지키고 그리고 백성을 지켰던 이순신 장군의 충정은 가슴에 무겁게 다가온다.

강한 남자의 영화다. 이순신과 구루지마의 대결이 불꽃 튀고 조선군, 일본군, 조선 백성 등 캐릭터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제 몫을 한다. 이에 못지 않게 바다의 다이내믹한 흐름, 배를 일자로 배치하는 일지진, 배 위에서 칼과 총으로 맞붙는 군사들의 전투인 백병전, 배와 배를 부딪치는 충파 등의 해전 전술과 화약 총통, 포와 조총 등의 무기도 또 하나의 조연 역할을 수행한다.

진지하고 장엄하며 비장하다. 유머나 해학이 낄 자리는 없다. 퓨전 사극들이 역사를 쉬이 곡해하는 환경에서 ‘명량’의 정통 전쟁 사극식 정공법은 성공적이다. 대한민국 호의 선장이 누구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현실에서 리더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요즘, 이순신 열풍이 반갑다. 사극은 동시대 대중의 집단 무의식을 우화적으로 반영한다. 바로 우리 모두는 이순신 같은 완전무결한 능력을 갖춘 희생적 영웅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만족스러우나 현실로 다시 돌아와 답답해진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동국대, 수원대 출강 중.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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