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마지막 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추적! 공자’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한 것은 작년 3월이었다. 원래 6개월만 연재하려고 했던 것인데 두 번이나 연장을 하여 결국 1년 6개월을 연재하게 되었다. 횟수도 모두 39번이나 된다. 개인적으로는 공자에 관한 나의 두서없는 생각을 발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처음 한상봉 주필(당시 편집국장)과 만나 집필 방향에 대해 협의할 때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마침 잘 되었다. 논어를 공부할 때 나는 공자의 가르침이 그리스도교와 너무나도 유사점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런 얘기도 소상히 풀어보겠다.”

그런데 막상 집필에 들어가고 나서는 이상하게 그런 글이 잘 쓰이지 않았다. 막상 그런 글을 쓰려고 하면 무언가가 벽처럼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가톨릭의 안방에 들어와 공자를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지레 위축되어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조금 더 점잖게 말한다면 저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의 ‘에비’를 스스로 내면화했다고 할까?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연재가 시작되기 얼마 전, 한 모임에서 논어 강의를 마치고 간단한 다과를 갖는 자리에서였다. 편안한 자리였기 때문에 내가 무심히 그리스도교와 공자의 가르침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지는 현실적 의의와 그 변천 과정을 개관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 분이 나서서 항의 비슷한 말을 했다. 지금은 다 잊어서 “그리스도교는 종교이고 공자의 가르침은 그냥 철학에 불과하다”던 말만 기억이 난다. 다만 요지만 좀 단순하게 간추린다면 “하느님과 동격인 예수님 곁에 어찌 한낱 인간에 불과한 공자를 나란히 세워 키 재기를 하려 드느냐? 그냥 공자에 대해서만 말하라” 하는 이야기였다.

예상치 못했던 것도 아니었고 종교계에서는 늘 있는 일이겠지만 직접 겪는 경험은 솔찬히 충격적이었다. 낯선 분도 아니고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사실만 몰랐을 뿐 내가 잘 아는 분이기도 했다. 당시의 느낌은 마치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북측에서 온 가족으로부터 “위대하신 지도자 동지”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그 후 이삼일 간을 ‘내가 왜 그런 경솔한 말을 했던고’ 하는 자괴감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내가 한 말이 정당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서도 아니었고 그분의 말이 정당했음을 인정해서도 아니었다. 작은 해프닝이기는 했지만 종교라는 영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런 문제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쉼 없이 전개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래도 현실 종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왔기 망정이지 아마 어떤 분들은 훨씬 자주, 훨씬 더 심각하게 그런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연재가 5회에 이르렀을 때 나는 ‘우리는 어떻게 잘못에서 벗어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과(過), 즉 잘못과 그 잘못에서 벗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중요한 과제는 신약에서 예수가 말한 ‘죄에서 벗어나는 문제’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거기서 나는 과오에서 벗어나는 공자의 논리와 죄에서 벗어나는 예수의 논리가 얼마나 서로 닮아 있는지를 자세히 다루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냥 공자에 대해서만 말하라”가 남긴 악몽이 작용한 탓이었을까?

다만 그 글의 말미에 가서 나는 공자가 제시한 방법이 결국 ‘옳다 함〔義認〕’에 이를 것이라 하여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교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그마저 매우 주저하며 사용하던 기억이 난다. 가로막힌 벽과 그 앞에서도 꿈틀거리지 않을 수 없던 나의 욕구가 만나 형성한 가련한 접점이었다.

나는 스물네 번째 연재 ‘자로와 세례자 요한’에 이르러 비로소 낯선 두 세계를 한 자리에서 겹쳐 보았다. 그나마 직접 공자와 예수를 언급한 것이 아닌, 자로와 요한을 경유한 한층 우회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스물아홉 번째 연재에 가서야 비로소 ‘예수와 공자’라는 제목을 내걸고 나의 개인적인 체험 속에서 두 세계가 만나던 정황을 소개하며 조금 더 밀착된 시도를 해보았다. 연재를 시작하고 나서 자그마치 1년도 훨씬 지난 시점이었다.

종교란 인류가 참을 추구하는 다양한 양태 중에서도 가장 최고봉의 것이다. 그만큼 그냥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종교다. 그러다 보니 일상적으로는 그 가장 높은 행태에서 가장 낮은 행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천차만별한 행태들이 똑같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병치되어 있다.

그리스도교도 공자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그냥 서로의 겉만 보아서는 서로 다른 것만 부각될 뿐이다. 하나는 서양에서, 하나는 동양에서 출현하였다. 하나는 유일신의 전통 위에 서 있고 하나는 그런 배경이 없다. 예수는 삼십 초반의 젊은이였고 공자는 칠십 노인이었다. 예수는 처형당해 죽었고 공자는 늙어 죽었다. 그리스도교는 전형적인 종교로 인식되지만 공자의 가르침은 종교의 개념을 크게 확장하지 않는 한 종교로 보이지 조차 않는다. 외양만으로는 도무지 차이만 보이지 눈을 닦고 보아도 일치점이 보이지 않는다.

일치점을 찾으려면 이런 모든 외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외형에 걸리지 않고 오직 가르침의 순수성 속으로만 들어갈 때 나는 그런 경이로운 만남이 가능하다고 본다. 불민한 나 자신으로 돌아와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볼만큼 철저하지도 못 했고, 또 희미하게 본 것마저 이런저런 고려를 한다는 핑계로 당당하게 말하지도 못하였다. 사람이 당당하게 말한다는 것은 그것이 현실 속에서 어떤 의미로 어떻게 작용하며 다가오는지를 여실히 통찰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말한 요나의 표적(表迹)이 그렇다. 시대의 기상을 읽지 못하는 자에게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은 공연한 수선밖에 무엇이 되겠는가? 공자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막스 뮐러는 일찍이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했다. 한 세기도 더 지나 문화의 뒤섞임이 더욱 진행된 오늘날에 와서 그 말은 더욱 절실해졌다. 현대는 그 휘황찬란함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아직도 까마득한 옛날에 형성되었던 종교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도 공자의 가르침도 그것을 배우고 깨닫는다는 것은 제가끔 이천 년 그리고 이천오백 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 배우고 그 배운 것을 가지고 다시 그만큼의 시간을 건너와 오늘에 접목시켜야 하는 매우 간단치 않은 일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 사이에 가로놓인 무수한 함정에 빠지고 곁길로 접어들기가 십상이다.

이런 어려운 일에 있어서 나는 내 젊은 날 바로 그 두 사람의 가르침이 놀랄 만큼 유사하면서도 충격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무딘 촉수가 닿았다. 그것은 도무지 행운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작고 미약한 경험에서 나는 공자와 예수, 논어와 성서 간의 상호 조명이야말로 각자의 특수성에 폐쇄적으로 매몰되지 않고 제가끔 의미를 이 혼융된 지구촌의 현실 속에서 일반화하여 거양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위험도 동반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섣부른 현학적 취미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도 제대로 알기 힘든데 양자의 상관성을 말한다는 것은 대개는 진지하지 못한 학문적 논의에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지구촌 시대에 수천 년 전 권역별 문명에서 형성된 종교로부터 무언가를 배운다는 과제가 갖는 이런저런 문제점은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일 수도 있다.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극복하지 않고는 시대의 현실에 뿌리내린 참된 종교가 형성될 수 없다는 생각은 결코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단위 종교에 나아가는 모든 행위는 못자리를 만드는 것과도 같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마치 못자리에서 한 해의 농사를 다 짓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정말 농사를 지으려면 그것을 밭으로 옮겨 모심기를 하는 저 이식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간 대화는 그 이식 과정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계기가 된다. 서로의 껍질을 깨지 않으면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화는 서로의 속만으로 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세상 그 어떤 위대한 종교도 그렇게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은 종교가 없다. 그리스도교도 공자의 가르침도 오히려 가장 전형적으로 그렇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한상봉 주필에게 얘기했던 것을 제대로 운도 떼어 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말았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가톨릭의 안방에 들어와 공자와 논어를 선뵐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종교간 대화의 좋은 단초가 되었다고 본다. 굳이 이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나는 더욱 이러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 대화를 위한 대화가 아니라 서로 각자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길이라면 어디에선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는 운명적 해후로서 말이다.
 

 
이수태
연세대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이번 회로 ‘이수태의 추적! 공자’ 연재를 마칩니다. 39회에 걸쳐 공자와 논어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