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38]

어떤 한 정신이 높은 진정성을 바탕으로 자신을 구현할 경우 후대의 정신이 그에 젖줄을 대고 발전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를테면 서양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철학에서 비롯되고 있다 하지 않는가.

논어에 깃든 공자의 정신이 또한 그렇다. 공자의 정신이 가졌던 너무나도 높은 진정성은 후대의 여러 정신들이 보여주는 다양성과 특징들에 대해 원천적(源泉的) 연관성을 가진다. 특히 춘추시대에 이어지는 전국시대의 소위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경우가 그렇다.

물론 그 각각이 가지는 구체적 연관성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따라서 어떤 경우는 단지 짐작일 뿐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관성을 찾아보는 것은 선진(先秦) 시대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양주(楊朱)
양주의 이른바 위아론(爲我論)은 그 자세한 것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단지 “내 몸의 털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하지 않겠다”는 매우 극단적인 말 한마디가 그 특징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을 형편없는 이기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맹자가 당시의 천하 사상계를 양묵(楊墨)이 서로 반분하고 있었다고 할 만큼 그의 사상은 당시의 사려 깊은 지식인들에게 강한 침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주가 공자의 사상 일단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단편은 다음 단편이다.

“옛날의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배웠으나 요즈음의 배우는 사람들은 남을 위해 배운다.”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14/25

구태여 한 가지를 더 들자면 해석상 묻혀 있었던 단편이지만 다음 단편을 더 들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마라.”
己所不欲, 勿施於人. 12/2

맹자마저도 공자 사상의 이런 측면, 훗날 양주에게 높은 착상과 진지한 이론적 전개를 가능하게 하였으리라 여겨지는 이 위아론적 측면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바로 이 사상이 지닌 고도의 역설적 구도 때문이다. 남에게 베풀겠다고 나서지 마라 하는 것은 적어도 오늘날의 모든 뜻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자(老子)
노자의 사상을 몇 마디로 간단히 압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단지 무위(無爲)가 그 중요한 한 측면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무위를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 바로 공자였다. 공자는 무위에 매우 뚜렷한 의미와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스린 이는 곧 순임금이실 게다. 실로 무엇을 하셨겠느냐? 스스로를 공경히 한 채 똑바로 남면하셨을 뿐이다.”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15/5

세상에 대한 작위적인 베풂 없이 단지 자기자신만을 올바로 한다는 것은 비단 이 단편만이 아니라 논어의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다만 이 단편에서 최초로 無爲라는, 훗날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용어를 사용하였고 노자는 바로 이 용어에서 남다른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훨씬 노장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제14 헌문편과 제18 미자편에 수록된 일련의 단편들은 그런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 거기에 등장하는 미생무(微生畝), 신문(晨門), 하궤자(荷蕢者), 초광접여(楚狂接輿), 장저(長沮)와 걸익(桀溺), 장인(丈人) 등 노장적 주인공들과 그들이 내세운 주장은 초나라에서 비롯된 신흥 사유의 위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들 단편들은 공자 사후 논어 판본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노장적 사유가 뒤늦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명가(名家)
명가의 사상가로는 혜시(惠施), 공손룡(公孫龍), 등석(鄧析), 윤문(尹文) 등의 이름이 일컬어진다. 주창자에 따라 내용이 다르고 그마저 대부분 일실되어 자세한 것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된 내용은 명(名)과 실(實)의 일치 문제였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사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나중에 논의가 논리학 쪽으로 흘러간 것 같지만 적어도 명과 실의 일치라는 만만치 않은 문제를 다루었다면 그것은 바로 공자의 저 유명한 정명사상(正名思想)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로가 말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하면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명칭을 바로잡겠다.”
자로가 말했다.
“그런 것도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너무 우원(迂遠)하십니다. 그것을 바로잡아 뭐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조야하구나, 유(由)는!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워 두어야 하는 것이다. 명칭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조리가 없어지고 말이 조리가 없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며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적절해지지 못하며 형벌이 적절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데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무언가를 명명(命名)하면 반드시 말할 수 있게 되고 말하면 반드시 행할 수 있게 되니 군자는 그 말에 있어서 구차함이 없을 따름이다.”
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事不成則禮樂不興, 禮樂不興則刑罰不中, 刑罰不中則民無所錯手足. 故君子名之必可言也, 言之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13/3

이 단편과 명가 사상가들이 다루었던 명(名)은 노자가 자신의 도덕경 첫머리에서 언급한 저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의 명(名)과 동일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법가(法家)
법가는 위에서 언급한 양주나 노자 또는 명가 사상가들처럼 논어에 기록된 공자 사상의 몇몇 단서들에 의해 형성, 발전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사상이다. 왜냐하면 논어에 보면 법가적 사유를 그린 단편들이 제법 눈에 띄지만 그것들은 모두 넘어서야 할 대상, 즉 부정적 대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래 특별한 사상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매우 속된 견해였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가면 한 나라의 내부 질서를 형성하는 데에 유효한 방법으로 받아들여졌고 어쩌면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에 있어서 실제 큰 효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 생명력은 짧고 피상적인 것이었다.

“정령(政令)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겨우 따르게는 되겠지만 부끄러워할 줄 모르게 된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리면 부끄러워할 줄 알게 되고 또 저절로 갖추어 갈 것이다.”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2/3

섭공(葉公)이 공자께 말했다.
“우리 무리에 행실이 곧은 자가 있는데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자식이 그것에 대해 증언을 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무리의 곧은 자는 그와 다릅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숨겨주니 곧음이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13/18

공자가 덕에 의한 정치를 역설할 때마다 늘 동원된 대척적 가치관이기도 했던 것이 바로 법가적 가치관이었다. 정신과 육체처럼 두 가치관이 긴 역사를 관류하며 서로 따라다녔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유가(儒家)
마지막으로 말할 학파가 맹자, 순자 등을 위시한 유가다. 혹자는 공자 자신이 바로 유가의 원조인데 공자와 논어에서 비롯된 제자백가의 유형에 유가를 포함시킨다는 것은 괴이한 발상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자와 유가는 분리시켜 생각할 필요성이 있다. 아니, 그 필요성은 매우 높다.

공자는 춘추시대인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사후 직계 제자들이 그의 어록을 남겼다. 비록 증자나 자하 등 그의 직계 제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는 하지만 유가는 공자에 가깝다기보다는 그로부터 비롯된 여러 제가들, 노자나 양주나 명가 사상가들에 가까웠다. 다만 다른 사상들에 비해 공자에 닿는 접점이 조금 더 포괄적이고 다면적이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유가 사상가들이 다른 사상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인식은 거듭 강조해둘 필요가 있다. 유가는 공자와의 관계에서 결코 특권적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자와 논어는 이렇게 전국시대의 여러 사상에 긴 그늘을 남겼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공자의 진면목은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유가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 이후의 세월에 있어서도 사정은 동일할 것이다. 특히 송대의 개신유학도 마찬가지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공자가 보여준, 기적적 인물에게서만 발견되는 진정성은 적어도 동양에 있어서는 다시는 더 발견되지 않았다고 나는 본다.


 
이수태
연세대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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