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37]

언젠가 공자는 제자 안연을 칭찬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쓰면 행해지고 거두면 간직된다’는 것은 오직 나와 너만이 갖추고 있구나!”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唯我與爾有是夫!) 7/11

겉보기로 보면 이 말은 특별히 어려운 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여다보며 생각을 거듭할수록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진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용지(用之)와 사지(舍之)를 위정자에 의해 등용되는 것과 내쳐지는 것으로 해석하여 이 말을 매우 단순화하고 있다. 그러나 用之와 舍之는 등용이 되는 것과 내쳐지는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운 말이다. 물론 대부분 등용과 내쳐짐이 전제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用之는 어디까지나 쓰고 발휘하는 것을, 舍之는 거두고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쓰고 거두는 것이 행위자의 자의에 맡겨진 것은 아니다. 대개 쓰는 것과 거두는 것은 나라에 도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즉 시대적 상황에 연동된다. 몇몇 다른 단편들은 이 측면을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

“군자로구나, 거백옥(蘧伯玉)은!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을 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거두어 품을 줄 알았다.”
(君子哉! 蘧伯玉. 邦有道則仕, 邦無道則可卷而懷之.) 15/7

“영무자(甯武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다. 그 지혜에는 미칠 수 있어도 그 어리석음에는 미칠 수가 없구나.”
(甯武子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5/21

나라에 도가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것은 건전한 상식의 수준에서 판단되었던 것 같다. 특히 그 중에서도 유도하다는 것은 결코 어떤 완전히 이상적인 상태나 완결된 역사적 국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전제 하에 다시 안연에 대한 칭찬으로 되돌아가서 ‘쓰면 행해진다’는 말을 생각해 보자. 만약 안연이 칭찬할만한 사람이 못 되었다면 그는 ‘쓰더라도 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매우 흔한 모습이 아닐까? 나라의 위정자가 뭔가를 해보겠다고 시도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너무나도 흔하다.

논어 안에 나오는 한 예를 들어보더라도 언젠가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계강자가 공자에게 “무도(無道)한 자를 죽여 백성들로 하여금 유도(有道)한 데로 나아가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如殺無道以就有道, 何如? 12/20)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일벌백계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공자는 그 계획을 반대했다. 만약 계강자가 그대로 시행했더라면 그 정책은 성공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백성들을 유도한 데로 나아가게 하는 정당한 방법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용지즉행(用之則行), 즉 쓰면 행해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사지즉장(舍之則藏), 즉 거두면 간직되는 것은 쉬운 일인가? 역시 그렇지 않다. 상황이 무도한 역사적 국면일 때는 뜻을 펼치지 못하고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긴다. 여기에서 전개될 수 있는 행태가 바로 藏, 즉 간직하는 것이다.

이 말은 간직하는 것이 바람직하거나 최소한 불가피한 행태라는 가치 평가를 동반하고 있다. 간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펼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보이지 않게 깊이 숨긴다는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반론에 직면하게 된다. 왜 무도한 시대라고 하여 펼치지 않고 간직하기만 하여야 하는가? 그런 시대일수록 더욱 강한 의지로 뜻을 펼쳐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있을 수 있는 질문에 대해 준비된 대답처럼 제시되어 있는 단편이 바로 술이편 제2장이다.

선생님께서 남용(南容)을 두고 말씀하셨다.
“나라에 도가 있어도 추구함을 폐하지 않겠고 나라에 도가 없더라도 처형은 면할 사람이다” 하고 당신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셨다.
(子謂南容; 邦有道不廢, 邦無道免於刑戮. 以其兄之子妻之.) 5/2

나라가 무도해진 상황에서 그 상황을 뒤집어 보려는 직접적인 시도는 완강한 현실의 장벽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가 바로 형륙(刑戮), 즉 잡혀 처형을 당하는 것이 된다. 물론 이 말로써 남용이 간직함〔藏〕을 실천할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무모한 행동주의자는 아니었음을 공자는 나름대로 인정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남용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공자가 무도해진 여건에서도 무조건 뜻을 펼치려 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님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藏, 즉 간직하는 것을 필요한 덕목으로 제시했다. 그것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와해되는 것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또 남용에 대한 평가에서 볼 수 있었듯이 현실과 충돌하여 비극적으로 궤멸되는 것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화초가 추운 겨울을 맞아 씨앗으로 자신을 갈무리한 다음 언젠가 다시 올 봄을 기다리는 자연의 이법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 점에서 藏은 특별한 균형이다. 공자는 그 균형을 현실과 그 현실 속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행태에 적용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과연 어떤 나라, 어떤 시대가 무도하고 혹은 유도할까? 이를테면 오늘의 우리나라를 유도하다고 보아야 할까? 무도하다고 보아야 할까? 공자가 논어에서 유도와 무도를 언급한 것은 모두 여섯 번이나 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여섯 번은 모두 어떤 구체적인 시기나 구체적인 나라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다. 이를테면 당시의 노나라를 유도하다거나 무도하다고 판단한 사례 같은 것은 없다. 여섯 번의 용례는 모두 조건절에 들어 있으며 가정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공자의 의도적 배치였을까? 나는 우연도 의도적 배치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안의 성격 자체에서 나온 필연적 구성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는 유도함과 무도함이라는 양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주어진 시대의 성격 규정을 회피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현실도 이분법적인 틀의 어느 한 쪽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펼쳐서 구현하는 것과 물러나 간직하는 것 또한 동시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공자는 “의로운 일에 대해 듣고도 능히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나의 근심이다”(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7/3)고 하였다. 이것은 간직한다는 것이 어떤 행위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간직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정태적인 것도 아니고 자족적인 것도 아니다. 의로운 일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근심이 아니라면 간직한다는 것도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이 근심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만 간직함이 성립하는 것이다.

자족적이고 정태적인 藏〔간직함〕은 봄이 와도 싹이 트지 못하는 씨앗처럼 썩은 藏에 불과하다. 따라서 실제에 있어서는 펼치는 일이 간직하는 일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 간직하는 일이 펼치는 일을 구축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 둘을 상호 배타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제에 있어서 유도함과 무도함을 상호 배타적으로 설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오류에 이를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펼치고 있다 하여 일률적으로 간직함이 없다고 할 수 없고, 반대로 간직하고 있다 하여 펼침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펼치는 일과 간직하는 일은 시대를 읽는 고도의 안목에서 비롯된다. 또 중정(中正)을 찾아가는 끝없는 모색, 자기도야와도 관련된다. 공자가 백이숙제를 물러나 간직하는 인물의 전형으로, 또 유하혜(柳下惠)와 소련(少連)을 나아가 펼치는 인물의 전형으로 제시하며 저마다의 의의를 인정한 다음, 자기자신과 관련하여서는 “나는 이와는 다르니 가하다는 것도 없고 불가하다는 것도 없다”(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 18/8)고 말한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현실로 돌아오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펼쳐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간직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는 동시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무도하기도 하고 유도하기도 하다. 우리는 나아가 펼치며 동시에 물러나 간직해야 한다. 이 괴이한 임무 앞에서 우리는 당혹스러워진다. 그러나 공자는 스스로의 삶으로 그 괴이한 임무를 실천했던 것이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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