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36]

백이숙제는 동양의 정치학적 상상력에 있어서 무한한 원천이 되는 사람들이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이 ‘백이열전’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기적으로도 그들은 주나라가 건국되던 기원전 1046년에 이미 노인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3100년 전의 사람들로 그들을 중요한 정치적 인물로 부각시키는 데에 누구보다 결정적 역할을 한 공자(기원전 551~479)에 비해서도 대략 6세기 정도 앞선 전설적 인물들이었다. 그들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결코 복잡하지 않다. 사마천의 백이열전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로서 아버지는 숙제에게 뒤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은 뒤에 숙제는 형인 백이에게 양보하였다.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거절하며 도망하여 숨어 버렸다. 숙제도 또한 자기 뜻을 고집하다가 마침내 도망해 숨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나라의 백성들은 차자를 세워서 임금을 삼게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서백(西伯, 周의 제후) 昌이 늙은이들을 잘 돌본다는 말을 듣고서 주나라에 가서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주나라에 가서 보니 서백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리고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서백을 문왕(文王)이라고 일컬으며 그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동쪽 끝에 있는 은나라 주왕(紂王)을 치려고 하는 판이었다.
백이숙제는 왕이 탄 말을 손으로 쳐서 멈추고 충고하였다.
“부왕이 돌아가시고 아직 장례도 끝나기 전에 무기를 손에 잡았으니 효라 할 수 있겠소? 또한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려고 하니 인이라 할 수 있겠소?”
왕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하자, 무왕의 군사 태공(太公) 망(望)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이다.”
하며 그들을 부축해 보내었다.
그 뒤 무왕이 은나라를 평정해 천하는 주나라를 종국(宗國)으로 삼게 되었는데 백이숙제 형제만은 이를 부끄러운 일이라 하여 신의를 지켜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였다. 그리하여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무왕은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되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더라.
신농, 우, 하는 어느 사이엔가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
내 어디로 돌아가리.
아, 가리라. 목숨도 이미 지쳤거니.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忽焉沒兮 安適歸矣
吁嗟徂兮 命之衰矣)

한마디로 그들은 주무왕의 은 정벌을 반대하고 비판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주나라는 그들을 건국을 방해한 사람들로 몰지 않고 의인들로 간주하였다는 것이다. 무왕의 최측근이던 태공망이 당시 현장에서 그들을 의로운 사람들로 규정한 것도 한 이유였겠지만 더 결정적인 계기는 6세기 후 춘추시대에 이르러 공자가 그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는 사실이다. 논어에서 공자가 백이숙제에 대해 언급한 사례는 모두 네 번이다. 까마득한 은말주초의 인물을 네 번이나 언급했다는 것은 결코 적지 않은 횟수다.

그 첫 번째로 소개할 단편은 제16 계씨편 12장에 나오는 다음 단편이다.

“제나라의 경공(景公)은 사두마차 천 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죽는 날에 백성들이 덕이 있다 일컫지 않았다. 백이숙제는 수양산 아래에서 굶어 죽었지만 백성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일컫고 있다.” (齊景公有馬千駟,死之日, 民無德而稱焉. 伯夷叔齊餓于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 16/12

이 구절을 보면 공자 당시 백이숙제를 칭송하는 것은 춘추시대 백성들의 일반적 경향이었던 것 같다. 공자는 일단 이 일반적 경향을 인정하고 긍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제5 공야장편 23장과 제7 술이편 16장에 다시 백이숙제에 관한 짧은 언급이 나오는데 이미 공자에게도 까마득한 옛날의 전설적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새삼스레 그들을 평가하는 언급은 아니었다. 이미 정평이 난 인물들을 통해 공자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표명한 것이 두 단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정치사에 있어서 폭군 주(紂)를 쳐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무왕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내내 정치학의 숨은 주제였다. 또 그것은 불가피하게 백이숙제에 대한 평가와도 맞닿아 있었다.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입장은 일견 애매해 보인다. 무왕의 거병을 비판한 백이숙제를 현인으로 칭송했다는 점에서는 공자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공자는 무왕의 역사적 역할과 공적을 인정하고 기린 것도 사실이다. 그는 문무지도(文武之道)라는 말을 통해 무왕을 문왕과 병칭했고 그 말에 요순지도(堯舜之道)에 가까운 의의마저 부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무왕의 음악인 무(武)에 대해서는 “아름다움은 다하였으나 선함은 다하지 못하였다”(盡美矣, 未盡善也. 3/25)고 하여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에 대해 “아름다움을 다하였을 뿐 아니라 선함도 다하였다”(盡美矣, 又盡善也)고 한 것과 차이를 두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무왕에 대해서는 전설적인 성군(聖君)의 의의는 유보하고 있었던 셈이다.

공자의 이런 애매한 입장이 백이숙제에 대한 평가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네 번째 단편 제18 미자편 8장이다. 거기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이는 백이와 숙제일 것이다. ……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와는 다르니 가하다는 것도 없고 불가하다는 것도 없다.” (…… 不降其志, 不辱其身, 伯夷叔齊與! …… 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 18/8

말미의 묘한 말로 공자는 무왕에 대한 평가에서와 같이 백이숙제에 대한 평가에서도 애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애매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자에 비하면 맹자는 무왕이 주를 친 것에 대해 훨씬 명료한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 제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탕이 걸을 치고 무왕이 주를 친 것을 들어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일이 가한가?”(臣弑其君可乎) 하고 물었을 때 맹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짊을 해치는 자를 일컬어 적(賊)이라 하고 의로움을 해치는 자을 일컬어 잔(殘)이라 합니다. 잔적(殘賊)의 사람은 일개 사내라 하니 저는 일개 사내 주(紂)를 죽였다는 것을 들었지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 했습니다.” (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 殘賊之人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 <맹자> 양혜왕 하

다시 말해서 임금답지 않은 임금은 임금이라 할 수 없으니 탕무(湯武)는 일개 사내를 죽였을 뿐 결코 임금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한 마디로 맹자는 역성혁명의 이론적 기초자가 되었다. 그는 정당하지 않은 권력의 횡포 앞에서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명한 답을 주었다.

백이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늘어졌지만 맹자였다면 어떠했을까? 한바탕의 지지웅변이라도 하였을까? 역사는 그런 맹자에 대해 아성(亞聖)이라는 절묘한 이름을 붙였다. 그의 논리가 너무 선명했기 때문이다. 공자의 논리는 그의 논리에 비하면 애매하다. 그런 공자를 사람들은 성인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인간 삶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인간이 세우는 논리 앞에서 선명함보다는 애매함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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