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34]

누가 논어를 배운다고 하면 무엇보다 선생이라는 사람이 칠판에 한문을 써놓고 읽은 다음, 그 한문을 한 구절 한 구절 해석해 가며 뜻풀이를 하는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논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현장은 어디나 비슷한 모습이다. 멀리 갈 것 없이 나 역시 그렇게 논어를 강론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그 방법에 회의를 느끼곤 했다.

왜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의 경우와 대비를 해본다. 성서의 어디에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나오던가? 번역된 한글 성서만으로도 그리스도교는 훌륭히 교본을 삼고 있다.

나는 논어도 번역된 한글 교본만으로 부족함 없이 공부할 수 있을 때가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모임에 논어 강사로 초빙되어 가서 한글로 된 논어만 제시하고 무슨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들이 무어라고 할까? 당장 ‘저거 뭐야?’ 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논어 강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아예 주된 목적이 한문 공부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논어를 강론하는 선생들에게 있다. 강론의 70~80% 비중을 그들 스스로 한문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강론에서 그 부분을 걷어내려 한다면 그들은 화들짝 놀랄 것이다. 마치 박쥐가 살고 있는 동굴 속으로 환하게 햇볕을 들여보내는 것만큼이나 그것은 충격적일 것이다.

듣는 자들의 대부분이 한문에 능통하지 못하다는 점에 기대어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강사들이 의외로 많다. 가끔 유튜브에서 그들이 펼치는 강의 동영상을 보기도 하는데 한문 실력을 늘어놓다가 오버를 해서 엉터리 해자(解字) 실력까지 과시하는 데에 이르면 온몸이 오글거려 보고 있는 내가 쥐구멍을 찾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막상 한문의 필요성으로 말하자면 나보다 그 필요성을 더 절실히 느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논어 521개 단편 중에서 60~70개의 단편에 걸쳐서 전통적인 해석을 바꾸었다. 그것도 바꾼 해석의 3분의 2 정도는 공자의 말이 논어라는 책으로 정리된 이후 2500여 년 만에 처음 선뵈는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해석적 입장을 꼼꼼하게 변론하지 않을 수 없고 변론을 하자면 부득이 한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는 원문을 둘러싼 해석적 논란을 나의 종국적인 목표로 삼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논어를 읽는다는 것은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한 기적적 인물이 남긴 말의 의미를 깨닫고 배우는 일일 뿐이다.

나는 그것을 위해서도 깔끔하고 사족 없는 한글 논어 교본이 출현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나의 <새번역 논어>의 순 한글판을 내고 싶다. 한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 이 순 한글판 논어를 생각하면 나는 공연히 가슴이 설렌다. 불필요한 해의(解義)니 강설(講說)이니 하는 것도 최대한 자제하고 논어를 읽는 데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해설만을 담아서 폭넓게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논어를 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나이가 어린 청소년들이나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잘 읽힐 수 있는 책을 낸다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제대로 번역된 한글 논어는 쉽고 접근이 용이한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관심사가 배제된 논어를 말한다. 무슨 대단한 한문 실력이나 역사적, 경학(經學)적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 논어, 공자가 가르침을 베풀던 그 당시의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만 요구되는 논어를 말한다.

낡은 권위,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외형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의외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정이 논어에 비하면 현저히 나은 성서를 두고도 다양한 현대어 판본이 있지만 구투의 옛 한글 개역판에 끊임없이 이끌리고 있는 것은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예수의 말을 존댓말로 번역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면 상황은 자못 심각하기까지 하다.

그 점에서 논어든 성서든 늘 원초적 상황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긴 역사는 그 원초적 상황에 불필요한 손때를 묻혀 왔다. 역사와 문화가 오래되면 오래된 금동 제품처럼 원래의 빛깔과 광택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손때는 익숙하고 편안하지만 기본을 잃고 거짓된 타성 속을 헤매는 것도 바로 그 손때에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학이시습지하니 불역열호아,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호아.” 누군가는 이런 낭랑한 소리에서 향수도 느끼고 고적한 아름다움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런 의고적 취미 속에 안주해 있거나 잠들어 있는 논어 정신을 깨워야 한다. 그 속에서 칼날처럼 시퍼런 진실을 끄집어내어 그 옛날 춘추시대의 현실 속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의 현실 속에 불안하고 껄끄러운 구도로 배치해야 한다. 어느 곳, 어느 때에도 진실은 결코 나긋나긋하지 않았다.

예수는 긴 옷을 입고 품에 한 마리 어린 양을 안은 채 석양이 비낀 낮은 동산을 그림처럼 거닐던 사람이 아니었다. 공자도 그 잔잔한 가르침 앞에서 제후도 대부도 머리를 조아리던 사람이 아니었다. 논어도 마찬가지다. 논어가 한문 공부의 축 늘어진 타성에 젖은 의고적 문헌으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아무 것도 못한다. 능력만 된다면 논어를 그 원초적 상황에서처럼 위험하고 불온한 물건으로 다시 만들어 놓는 것이 나의 꿈이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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