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33]

논어의 형성에는 여러 사람이 기여했다. 주인공인 공자는 당연히 결정적 역할을 하였지만 단지 공자의 기여만으로 논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공자의 말을 듣고 기록으로 남긴 제자들이 있고 또 그것을 여러 개의 편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엮은 편집자가 있다. 나는 문헌으로서의 논어를 이야기하면서 가끔 이 세 기여자들―공자와 기록한 제자들과 편집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곤 한다.

먼저 공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뛰어나다. 종종 우리는 그의 눈높이 수준에서 그를 만나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는 우리의 눈높이보다 비할 바 없이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나름대로 오랜 세월 공자의 눈높이를 따라잡겠다고 안간힘을 써온 나의 경험 끝에 내린 솔직한 결론이다. 두 번째로 자공을 위시하여 논어 단편을 기록으로 남긴 몇몇 제자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들은 매우 명민하고 뛰어난 제자들인 것은 틀림없지만 오늘날 우리들 중의 뛰어난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은 아니었다. 대략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역시 경험에 따른 나의 판단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논어를 편집한, 구체적으로 그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 재전제자(再傳弟子)일 것으로 보이는 어느 편집자(혹은 복수의 편집자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는 오늘날 우리들 중의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보다는 수준이 좀 낮은, 어쩌면 매우 단순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논어를 주의 깊게 읽다보면 때때로 본의 아니게 편집자의 의중을 엿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지곤 한다. 대부분은 ‘아하, 논어를 편집한 사람이 이 단편을 이렇게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편집을 했구나’ 하는 경우인데 그것이 때때로 매우 재미있고 심지어 코믹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 가장 전형적인 예가 바로 논어의 모두를 장식하고 있는 저 學而時習之章이다. 논어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이 장 만큼은 알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이 장에 논어 편집자의 극히 단순한 편집의도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 의도는 다름 아닌 나이 어린 초급반 학도들에게 공문의 기본적인 가르침 중에서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비교적 쉬운 단편을 고른다는 것이었다.

學而時習之章에 바로 ‘배운다’(學)는 말과 ‘익힌다’(習)는 말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편집자가 보기에 초급반 학생들에게 열심히 ‘배우고 익히라’는 말보다 더 절실한 말이 어디에 있겠는가? 요즈음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심리가 편집자에게 있었던 것이다. 學 자와 習 자를 보는 순간 편집자는 ‘바로 이것이다’ 하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것을 이 위대한 전적의 제1장으로 정했음에 틀림없다. 학이편의 편집 취지는 공자의 어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초급반 학생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쉬운 교재를 만드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學而時習之章은 인류 최고봉의 문헌인 논어의 첫머리로서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높은 수준과 예지를 갖춘 단편이다. 어쩌면 일부러 500여 개의 단편 중에서 첫 번째로 소개할 단편을 고른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성공적인 선정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편집자의 탁월한 수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단순하고 실무적인 요구 때문이었다는 것. 우연 치고는 참으로 아이러니컬하지 않은가?

다음 사례로 제3 팔일편 24장을 보기로 하자. 제3 팔일편은 예악에 관한 기록들만을 모아놓은 편이다. 그래서 제1장은 팔일무(八佾舞)라는 춤과 관련된 단편이고 제2장은 옹가(雍歌)라는 제사음악과 관련된 단편이며 제3장과 제4장은 예에 관한 공자의 직접적 언급을 담고 있다.

그런데 유독 제24장인 儀封人請見章은 예악과 관련이 없는 장이다. 그 내용을 보면 공자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이 주제이기 때문에 구태여 분류를 하자면 제7 술이편이나 제9 자한편에 수록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제3 팔일편에 수록이 되었는가? 바로 편집자의 단견 때문이었다. 이 단편에 목탁(木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편집자는 그것을 예기(禮器)로 보았던 것이다.

목탁은 다중이 모인 장소에서 관리가 무언가를 발표하기에 앞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방울 소리를 내는 요령 비슷한 기구다. 예기로 보기도 어려운 기구지만 설혹 예기라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비유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단편을 예악과 관련된 단편으로 분류한 것은 무리하고 유치한 판단이었다. 분류 기준에 관한 편집자의 의식 수준에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제5 공야장편은 공자가 제자들이나 기타 여러 인물들을 평가한 것만을 모아놓은 편이다. 재여가 낮잠을 잤다고 꾸짖은 말이나 자로가 용기를 좋아한다고 칭찬한 말 등이 모두 이 공야장편에 들어 있다. 그런데 자공의 말로 이루어진 다음 단편도 역시 이 공야장편에 들어 있다.

자공(子貢)이 말하였다.
“선생님의 문화론(文化論)은 들어 볼 수 있었으나 선생님께서 인성(人性)과 천도(天道)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들어 볼 수 없었다.”
(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5/13

이 단편은 공자가 문화에 대해서는 자주 이야기를 해서 들을 기회가 있었지만 인성과 천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실천적 차원을 벗어나 추상과 관념으로 흐를 것을 우려하여)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볼 수 없었다는 자공의 증언이다. 누군가에 대한 평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인물 평가만을 모아놓은 제5편에 들어 있을까? 그 이유는 역시 간단하다. 편집자는 이 단편을 자공이 자기 자신을 평가한 말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자평설(自評說)은 훗날 형병(邢昺)이 내린 해석이기도 한데 형병은 이 단편을 ‘공자께서 문화에 관해 하신 말씀은 쉬워서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인성과 천도에 관해 하신 말씀은 어려워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즉 자공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어려운 이야기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솔직한 고백을 담은 단편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이 해석은 물론 잘못된 해석이자 유치한 해석이다. 후에 주자가 주자학에 유리한, 또 다른 아전인수식의 해석을 하여 오늘날도 공연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 단편은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 편집자도 해석을 바탕으로 하여 편집을 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같은 공야장편의 제27장에는 다음과 같은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다 되었나보다! 나는 능히 자신의 잘못을 보아 속으로 스스로와 쟁송할 수 있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子曰; 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 而內自訟者也.) 5/27

이 단편은 과연 누구에 대한 평가일까? 편집자는 어떤 판단을 하였기에 이 단편을 공야장편에 포함시켰을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 단편은 누구에 대한 평가나 판단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태여 평가라고 본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한 평가일까? 아니면 ‘스스로와 쟁송할 수 있는 자’(自訟者)를 구체적 평가 대상으로 착각한 탓일까? 숨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탐색을 계속한다면 시간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이 단편이 공야장편에 속하게 된 것은 편집자의 낮고 보편성 없는 판단력 탓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유형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제9 자한편 21장에 다음과 같은 단편이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싹 트고도 꽃 피지 못하는 자가 있고 꽃 피고도 열매 맺지 못하는 자가 있다.”
(子曰; 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 9/21

싹(苗)과 꽃(秀)과 열매(實)는 도를 추구하는 인간이 직면하는 성취의 각 단계를 비유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진술이라 할 수 있다. 예수가 말한 ‘돌밭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와도 유사하고 그 의미는 거의 같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 단편이 하필이면 공자가 안연을 칭찬하거나 그의 이른 죽음을 각별히 애석해 하는 두 단편(9/19, 9/20)에 뒤이어 나올까? 우연한 배치일까? 아니면 9/21의 실제 케이스가 바로 일찍 죽고 만 안연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을까?

1/500의 확률로 우연히 배치된 것이라 하기에는 편집자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오해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엿보인다. 안연의 단명과 苗而不秀를 연결시키고 있는 편집자의 단견 앞에서 우리는 또 다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몇 가지 사례는 더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9/10에 나오는 안연의 긴 탄식을 편집자는 공자에 관한 직접적인 정보를 모아놓은 제9 자한편에 포함시켰는데 이는 “쳐다보면 더욱 높아지고 파면 더욱 견고해지며 앞에 있다 여기고 바라보면 어느새 뒤에 있구나”(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하는 말을 공자를 두고 한 말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그런 해석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공자도 안연도 매너리즘에 빠뜨리고 말 뿐이다.

편집자의 의중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논어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문제는 아니다. 또 일부러 보려고 해서 보는 것도 아니고 논어를 읽어가는 과정에서 저절로 눈에 띄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논어에 대한 해석이 논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부터 나타나는 만만치 않은 문제임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역시 그 어떤 비중을 가지고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논어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논어 그 자체가 주는 진지성 때문에 항상 풀지 못했던 긴장의 시간들을 비집고 잠시나마 웃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소재였다는 사실이다. 논어의 한 모퉁이에 이런 코믹한 측면도 있다는 것, 나름대로 흥미롭지 않은가?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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