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35]

일전에 어느 공공도서관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논어 강의를 의뢰받은 적이 있었다. 승낙을 해놓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강의일을 삼사일 앞두고 연락이 왔다. 강의 대상이 일반 주민이 아니라 초등학생들이라는 말이었다. 도서관 직원이 새로 전입을 와서 자기도 성인 대상인 줄 알았는데 확인해보니 초등학생이더라면서 강의가 가능하시겠냐고 물었다. 다소 황당했지만 취소하기도 뭣해서 그냥 해 보겠다 했다.

해당 날짜에 도서관에 가니 약 40여 명의 4 · 5 · 6학년 아이들과 학부모로 보이는 예닐곱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다소 혼선이 있어서 초등학생용 자료를 따로 준비하지 못했으니 양해해 달라고 하고 한문 투성이의 성인용 PPT를 올려놓고 강의를 했다. 다행히 번역문이 소개되어 있어서 강의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약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나는 강의가 잘 먹혀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논어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아이들로 하여금 논어와 공자에 대해 흥미만 갖도록 하겠다는 계획이 주효했던 것이다. 아니, 잘 먹혀드는 정도가 아니었다.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그동안 어떤 강의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희열을 느꼈다. 아이들이 뭔가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전해왔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의미 있고 보람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만약 성인 강좌와 어린이 강좌가 겹친다면 나는 단연코 어린이 강좌를 우선하겠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다. 그 일이 있은 후에야 나는 논어에서 공자가 보여준 소년들에 대한 태도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소년과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단편으로 술이편 제31장이 있다.

호향(互鄕)에 사는 함께 말하기 어려운 아이를 만나시니 문인들이 의아해 하였다. 이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의 나아감에 함께하는 것이지 그의 물러남에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심하다는 것이냐? 사람이 자신을 깨끗이 하여 나아가면 그 깨끗함에 함께해 주는 것이지 그의 모든 행적을 감싸주는 것은 아니다.”
(互鄕難與言童子見, 門人惑. 子曰;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 何甚? 人潔己以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 7/31

‘호향(互鄕)에 사는 함께 말하기 어려운 아이’〔互鄕難與言童子〕라는 말은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함께 말하기 어렵다〔難與言〕고 한 이유가 무얼까 하는 것이 핵심인데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고 나이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너무 어린 아이를 공자가 상대하니 통념상 제자들이 ‘심한 것 아니냐’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답변 내용을 보면 이 아이의 언행 자체에 좀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이유야 여하튼 공자는 이 어린 소년을 상대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을 했던 것 같다. 동자라고 했으니 그 아이의 나이가 대략 몇 살 정도였을까? 나는 열다섯 살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어쨌든 공자는 그런 어린 소년이라도 자신을 깨끗이 하여 나아간다면 그에 함께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당당히 피력하고 있다.

공자는 무언가 그 소년에게서 가능성을 엿보았을 것이고 그 점을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나이(또는 모종의 문제점) 때문에 그런 접촉을 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공자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은 어디에서 서로 달랐던 것일까? 예수에게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가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르 10,14) 했다. 그때 예수와 제자들의 생각의 차이도 비슷한 연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단편 하나도 역시 소년과 관련되어 있다.

궐(闕) 마을의 아이가 말 심부름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물었다.
“더 나아지려 하는 아이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가 어른들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연장자들과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더 나아지기를 구하는 아이가 아니라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아이다.”
(闕黨童子將命. 或問之曰; 益者與? 子曰; 吾見其居於位也, 見其與先生並行也. 非求益者也, 欲速成者也.) 14/47

여기서는 결과만을 놓고 볼 때 소년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는 아이라기보다는 어서 빨리 어른들의 세상에 끼어들어 한 몫을 해보려는 생각이 앞 선 아이라는 평가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평가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은 그런 아이가 관심 밖이 아니라 공자의 예리한 관심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나이를 무슨 계급장처럼 생각해서 10살 정도만 더 적어도 “새파랗다”는 표현을 써가며 마치 설익은 인간처럼 취급하는 것을 흔히 보는 오늘의 세태에 대해 분명히 교훈을 주는 바가 있다.

그러나 이 두 단편보다 소년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귀한 의의를 부여하는 참으로 귀한 단편 하나가 있다. 다름 아닌 저 위정편 제4장의 빛나는 진술이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정립되었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현혹되지 않았고……”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2/4

열다섯 살! 이 나이에 주목하자. 공자는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첫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다. 그는 그때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 그가 되돌아보며 그때그때 의의를 부여한 삶의 일곱 단계 중에서 과연 어떤 단계에 가장 중요한 의의가 있었을까? 그것은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한 이 열다섯의 나이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기특하고 눈물겹다. 열다섯 살의 공자를 그려 본다. 그날 그 공공도서관의 강의실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수많은 아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아이들의 영혼 속에 어쩌면 이미 만만치 않은 씨앗이 떨어져 움트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공자가 따로 있겠는가? 그 씨앗이 움트고 자라 꽃 피우고 이윽고 열매를 맺으면 그가 곧 공자가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나이를 계산하는 방법은 같다. 공자가 말하는 열다섯 살은 오늘날로 치면 중학교 2학년이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은 나에게 있어서도 모든 시간의 원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백일장에서 상으로 받은 <문장독본>이라는 책을 통하여 이상의 <권태>며 채만식의 <태평천하>의 문장에 접하였다. 정무심 선생의 <젊은날의 노오트>를 읽은 것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먼 곳에서 걸어오는 여학생의 교복 자태에 가슴 설레던 것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그 열다섯 살의 일치에 아직도 묘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어떤 소년들이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그 소년들을 잊고 있다. 그리고 우리 기성세대들이 그들의 순수한 영혼을 아무 생각 없이 오염시키고 있다는 사실마저 몰각하고 있다. 한마디로 무책임한 기성세대가 되었다는 것을 나는 특히 이번 세월호의 참극을 겪으며 절감하였다.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한 가지만 환기하고자 한다. 바로 소년과 관련된 공자의 입장이다. 일찍이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했던 말을 흉내 내어 말하자면 “그것을 생각하는 일이 자주며 또 오래면 오랠수록 더욱 새롭고 또 점점 더하여지는 감탄과 숭경으로써 마음을 채우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공자가 피력했던 자신의 필생의 소원이다.”

숱하게 인용했지만 그때마다 늘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공자의 소원은 공야장편 제26장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거기에 바로 저 소년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전략……)
자로가 말했다.
“선생님의 소원을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소원은) 늙은이들은 그것을 누리고 벗들은 그것을 믿고 소년들은 그것을 품는 것이다.”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5/26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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