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31]

만약 용한 점쟁이의 세속적인 관점에서 공자의 일생을 점쳐 본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공자의 인생은 결코 성공적인 인생으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고관대작이 되는 것도 아니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니고 중년을 넘어서는 자신의 나라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도 못하는 것이 그의 사주팔자일 것이다. 방황 십수 년 만에 늙고 병든 몸으로 소득 없이 고국에 돌아오지만 여전히 오해와 외면 속에 살아야 하고 자식이 먼저 죽는 악상까지 겪다가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이 그의 일생일 것이다. 점쟁이는 어쩌면 미안해서 복채를 사양할지도 모른다.

인류의 성인을 볼 때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일생이 이렇게 보일 수도 있고 저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은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그 일생을 다름 아닌 공자 자신이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매우 드문 기록이 논어 자체에 남아 있다. 어떤 분들은 ‘그런 기록이 있다고?’ 하겠지만 그 기록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기록이다. 다름 아닌 저 제2편 4장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정립되었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현혹되지 않았고 쉰이 되어 천명을 알게 되었고 예순이 되어서는 귀가 순응하였으며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더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子曰;吾十有五而志于學,三十而立,四十而不惑,五十而知天命,六十而耳順,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2/4

약 10개월에 걸쳐 진행했던 논어 전편 강의를 끝내던 날 나는 수강을 하신 분들에게 가장 마음에 들었던 논어 단편 10개를 뽑아보시라고 했다. 의외로 몇몇 분들이 바로 이 제2편 4장을 뽑았다. 내가 스스로 뽑은 10개 중에도 역시 이 단편이 들어 있었다. 이 단편은 늘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가 하면 어느 정도 접근을 했다고 여겨진 후에도 다시 접근을 하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나로 하여금 이 단편을 각별히 사랑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첫 구절이었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열다섯 살의 공자를 과연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구절은 바로 그 열다섯 살의 공자를 상상하게 만들고 있다.

2500년 전 노나라의 열다섯 살은 오늘날에 대입할 경우 중학교 2학년이나 3학년에 해당한다. 쇠퇴해 가는 주대 문명의 끝자락, 노나라의 수수(洙水)가, 중학교 2~3학년짜리 한 소년의 조그마한 가슴 한 켠에 삶의 진실에 대한 동경(憧憬)이 자리 잡아 움터갔던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닌가? 훗날 그가 유난히 어린 소년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인 것(7/31 互鄕難與言童子見章 등)도 어쩌면 자신의 소년 시절에 대한 기억과 그에 따른 무량한 감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志于學, 배움에 뜻을 두었다는 자전적 고백이 모든 삶에 있어서 소년기(少年期)가 가지는 의미로 보편화되어 있는 곳은 제5편 26장이다. 그곳에서 공자는 자신의 간절한 소원의 하나로 “젊은이들이 그것을 품는 것(少者懷之)”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둔 것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의의를 가졌던가를 공자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성장기의 소년들에게도 바로 그것을 바랐던 것이다. 오늘날이라고 하여 그것이 달라져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것은 여전히 커가는 아이들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이고 여전히 우리를 설레게 하는 무엇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知天命과 耳順이 삶에 있어서 윤리적 과제들이 어떻게 지양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제시되는 새로운 지평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선과 악이 만나 싸워 선의 승리로 끝나는 세계관이 조로아스터교의 기본 이론이었고 바로 그 단순 논리가 조로아스터교를 단명한 종교로 만든 주된 요인이었다 한다. 공자에게 있어서 의로움의 세계, 선과 악의 세계는 知天命과 耳順의 과제로 넘어가면서 극복되고 있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가슴에 늘 조용한 벅참을 안겨주었다. 그 때문일까? 지난 해 이래 나는 오히려 의로움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집요할 정도로 다가갔다. 어쩌면 그런 역설적 자세를 보이게 된 것은 그것이 해소될 수 있는, 믿을만한 구석이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좀 더 최근에 새로운 느낌을 던져준 것은 그의 생애 최만년의 단계로 그가 진술한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였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더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는 말과 관련하여 나는 언젠가 작은 글 하나를 페이스북에 올린 적이 있었다. 다음은 그 글이다.

“말한 것을 가지고 후회를 할 때가 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본 적은 없지만 말해봤자 ‘뭘 그런 사소한 것을 가지고 그러느냐’고 할 것이 뻔하다. 상대방이 느꼈을까 하는 정도지만 나는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밤에 누워서도 생각나고 이튿날도, 며칠이 지나서도 부끄럽다.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그러다가 얼마 전 공자의 말이 생각났다. 공자는 나이 오십에 知天命을, 육십에 耳順을 이야기하였다. 어느 누구도 그 나이에 해낼 수 있었다고 감히 말하기 어려운 육중한 과제들이다. 그런데 그 모든 나이가 지나고 칠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내었다고 말한 것이 바로 從心所欲,不踰矩, 즉 마음 내키는 대로 하더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는 과제다. 공자도 육십이 갓 지난 내 나이 정도에서는 아직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것이 지천명과 이순보다 더 높은 과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과연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별 생각 없이 했던 말과 행동을 가지고 후회를 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에 중심이 잡히는 것은 삶의 사소한 과제, 일상적 과제가 아니라 어쩌면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과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그것이 환갑을 지낸 이 나이까지도 제 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 한심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구차한 변명은 아닐까 하는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최근에 공자의 이 자전적 고백에서 나는 새로운 측면을 발견했다. 그렇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는 열다섯 살에서 일흔 살에 이르기까지의 긴 인생을 말하고 있었지만 돌이켜보니 그는 그 어떤 단계에서도 한 발자국도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지향한 것, 또 그가 이룬 것, 모든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었다. 志于學에서부터 立을 거쳐 不惑, 知天命, 耳順, 그리고 從心所欲,不踰矩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지 자신과 싸웠고 자신에서만 이루었던 것이다. 어쩌면 늘 보던 당연한 것인데 새삼 “과연 공자로구나!” 하는 감탄을 발하게 된다.

바깥에서 이룬 그 어떤 것도 그의 자전적 고백 안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고관대작이 되지도 못했고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했다. 그 자신의 바깥에서 그는 무엇 하나 이루지 못했다. 점쟁이의 점괘로 보면 그는 자기 자신의 바깥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는, 완전히 꽉 막힌 인생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 그랬다. 그는 자기 자신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야말로 그가 인류의 중심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인류가 가장 중심된 곳에서 그를 만났다. 어떤 인생, 그의 짧은 자전적 고백에서 이 기막힌 측면을 발견하고 또 한 번 무릎을 치며, 이 희유한 인간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경탄해 마지않는 오늘이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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