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30]

김우창 교수는 어떤 대담에서 "의로운 사회보다는 어진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연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할 때 ‘인’이 위고 ‘의’가 두 번째로, 인이 더 위에 있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도 정의를 중요시하지만 더 중요한 게 사랑이고, 불교에서도 진리를 존중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자비지요. 인간의 많은 문제는 부분적 덕성으로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정의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덕성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이 놈 꼭 죽여야 한다고 하다가도 차마 못하는 것이 인간 마음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지요. 그리고 궁극적으로 건전한 인간사회를 만드는 통로일 것입니다. 정의 하나만 가지고는 참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지요. 정의와 더불어 사랑도 있고 인간애도 있고, 여러 가지 연결 속에서만 인간의 진리는 유지될 수 있지요.” (세 개의 동그라미-마음·지각·이데아, 2009)

그가 제기한 화두가 며칠째 마음속에서 맴을 돌고 있지만 솔직히 별 진척이 없다. 일단 나는 맞다고 본다. 큰 틀에서는 동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일반적으로 인이 의보다 더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져서가 아니라 인간이 살면서 맞는 모든 문제는 그 처음에서도 마지막에서도 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옳고 그른 것을 목소리를 높여 따지는 것도 그 애초에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시작된 것이고 그 종국에서도 인간에 대한 관심만이 명분으로 남을 것 아닌가.

그러나 의로운 사회보다는 어진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 말을 나는 아직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어딘가에 나도 모르는 망설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이 사는 어떤 사회가 의로움에 있어서 완전할 수 있겠는가?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의로운 세상이 출현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을 물려받았고 또 물려줄 것이며 그것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불의와 거짓이 횡행하더라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것이고 우리는 불완전한 채로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가며 살아야 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사회의 의로움 여부를 떠나 먼저 어진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요구일 것도 같다.

그러나 의롭지 못하고도 어질 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다른 한 쪽에서 생기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의롭지는 못하지만 어진 사람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설정일까? 의롭지는 못하지만 어진 사회라는 설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논어를 몇 차례 훑어보았지만 의로움에 대한 언급도 적지 않고 어짊에 대한 이야기도 여러 번 나오지만 아쉽게도 의로움과 어짊의 관계를 언급한 곳은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를테면 공자는 어짊과 용기의 관계를 언급한 적도 있었고 군자와 어짊의 관계를 언급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어짊과 앎의 섬세한 관계를 언급한 적도 있었다.

어진 자는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 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다.
仁者必有勇,勇者不必有仁. 14/5

군자이면서 어질지 않은 자는 있었어도 소인이면서 어진 자는 없었다.
君子而不仁者有矣夫,未有小人而仁者也. 14/7

앎이 그에 미쳤더라도 어짊이 그것을 능히 지키지 못하면 비록 그것을 얻더라도 반드시 잃고 말 것이다.
知及之,仁不能守之,雖得之,必失之. 15/33

 
그러나 왜 의로움과 어짊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을까? 그 관계를 찾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것일까? 이를테면 김우창 교수가 말한 것처럼 의로운 사회보다는 어진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 비슷한 것도 왜 없을까? 마치 어짊에 대해 공자가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듯이 그것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문제를 가지기 때문일까?

그런데 그렇게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 한 자리에 놓이기 어려워 보이던 의로움과 어짊이 약 두 세기 후 맹자에 이르러서는 마치 애초부터 그 둘이 하나의 개념이기나 했던 것처럼 '인의(仁義)'라는 어휘로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다. 『맹자』에는 仁義라는 말이 자그마치 27번이나 등장한다. 그리고 하나로 결합된 그 개념은 아무런 충돌도 빚지 않고 자연스럽게 임금을 깨우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에 유용한 어휘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차이가 있기는 있다. 공자에게 있어서는 어짊도 의로움도, 알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더구나 어려운 덕목으로 주어져 있었지만 맹자에 이르면 그것은 선택만 하면 언제라도 손 안에 넣을 수 있는 기성의 가치관처럼 제시되어 있다. 양자가 아무런 충돌 없이 결합된 것은 어쩌면 저 천하를 가득 채운 무수한 '仁義 아닌 것'들과의 대결이라는, 악화된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속악해진 전국시대의 양상이 그런 미시적(?) 문제점들을 모두 덮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의로움과 어짊 - 어쩌면 어디에서도 그것을 질서로 정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는 모순되어 보일 정도로 엄청난 신의 진노와 무한한 사랑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가지 않았던가? 간음한 여자를 단죄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하라고 했던 그는 이 세상에 화평를 주러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왔다고 하는가 하면 부모와 자식이 서로 불화하게 하려하며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고 저주를 퍼붓기도 하였다.

어쩌면 논어에서 공자가 보인 것이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의로움에 대한 그의 요구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군자가 천하를 대함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이것이다’ 하는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이것은 아니다’ 하는 것도 없다. (매사를) 옳음(義)에 견줄 따름이다.
君子之於天下也,無適也,無莫也,義之與比. 4/10

군자는 의로움을 기질로 하여 예로써 이를 행하고 겸손히 이를 표출하며 믿음으로써 이를 이루니 참으로 군자로구나!
君子義以爲質,禮以行之,孫以出之,信以成之,君子哉! 15/18

의로움이 천하만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예로써 행하고 겸손함으로써 표출하고 믿음으로써 이룰 바 바로 그 궁극적 목표가 되는 것이라면 그 어찌 절대적 목표가 아니겠는가? 그런가 하면 어짊에 대한 요구 또한 절대적인 것이었다.

군자가 어짊을 떠나서야 어떻게 이름을 이루겠느냐? 군자는 잠시 동안도 어짊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니 위급함을 당해서도 반드시 이에 의하고 파탄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이에 의해야 한다.
君子去仁,惡乎成名?君子無終食之間違仁,造次必於是,顚沛必於是. 4/5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인물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어짊을 해치는 일이 없으며 제 한 몸을 희생시켜서라도 어짊을 지킨다.
志士仁人,無求生以害仁,有殺身以成仁. 15/9

나는 생각해 본다. 어쩌면 의로움과 어짊이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직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의 실천적 삶 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우리 앞에 두고 공연히 바라보고만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대한 요구 이전에 우리 자신의 삶의 궁극에서 의로움과 어짊을 추구한다면 맹자의 저 미적지근한 인의(仁義)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궁행(躬行) 가운데에서 두 세계는 어느 순간 모순 없이 조화하지 않겠는가. 그 때까지 나는 아직 의로움과 어짊이라는 이 두 세계를 조화시키지 않으려 한다. 모순 속에 버려두려 한다. 다만 그 각각에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만이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생각하겠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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