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편 읽기 - 27장]

야훼께서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야훼께서 내 생명의 피난처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악한 무리들 휘청거리고 쓰러지리라. 그들은 나의 원수, 나의 반대자들,
그 군대 진을 치고 에워쌀지라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아니하리라. 군대를 몰아 달려들지라도 나는 그 속에서 마음 든든하리니,
야훼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한평생 야훼의 성전에 머무는 그것뿐, 아침마다 그 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라.
나 어려운 일 당할 때마다 당신의 초막 안에 숨겨주시고 당신의 장막 그윽히 감춰주시며 바위 위에 올려 높이시리니,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며 그 장막에서 제물 바치고 환성 올리고 노래하며 야훼께 찬양하리라.
야훼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소서. 불쌍히 여기시어 대답하소서.
이렇게 내 마음 그대로 아뢰옵니다. “나를 찾으라.” 말씀하셨사오니 야훼여, 이제 당신을 뵙고자 합니다.
당신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그동안 이 종을 도와주시었사오니, 진노하지 마시고 물리치지 마소서.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이 몸을 저버리지 말아주소서.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주실 것입니다.
야훼여,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소서. 원수들이 지키고 있사오니 안전한 길로 인도하소서.
원수들이 독기를 뿜으며 거짓 증언하러 일어났습니다. 이 몸을 그들의 밥이 되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나는 살아생전 이 땅 위에서 야훼의 은덕을 입으리라 믿사옵니다.
야훼를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야훼를 기다려라. (시편 27장)

ⓒ임의진
이른 여름 공기로 대지는 푹푹 찌고 있다. 계곡물에 서늘해진 수박을 썰어 친구들과 나눠먹고 싶어라. 햇살 자신도 더운지 나무그늘 아래로 쏙쏙 떨어지고 있다. 새들은 더운 창공을 날기를 포기하고 잎이 무성한 나무를 찾아 일 없이 쉬고 있어라. 이 더운 날씨에 적들에 쫓기던 시인, 주님의 초막을 찾아 숨고 싶다. 편한 마음으로 밀린 잠을 푹 자고 싶다.

그런데 시인의 처지는 지금 어떠한가. 내 부모도 나를 버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극도로 두렵고 피폐한 상태를 드러냄이겠다. 시편 22편에는 “워아노키 톨랏(벌레) 월로 이시(사람)”, 저는 벌레이지 사람도 아닙니다라고, 자신을 벌레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벌레와 같은 나, 더 이상 오만방자하지 않으리라 눈물을 떨군다. “골 엘르야흐웨.”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고, 주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결의에 찬 기도를 바치면서…….

살 길은 오로지 주님께로 난 길을 걸어갈 뿐. 오로지 주님의 초막을 향한 이 길 외에는 뜨거운 사막, 쫓기는 신세, 살아남기 어려운 악조건의 나날들. 히브리말로 ‘데렉’이 길이라는 단어다. 데렉은 특별히 예비된 무엇으로서의 길이 아니라 행동할 때, 내가 걸어갈 때, 내가 만들어 나아갈 때, 그게 바로 데렉이다. 히브리 민중들에게 길은 역시 이집트를 떠나 팔레스티나 가나안으로 오던 그 길을 가리킴이다. “우리가 뚫고 지나온 모든 길”(여호 24,17). “네 길을 주님을 향해 두어라”(시편 37,7).

“주님 당신의 길을 저에게 가르쳐주시고, 바른 길로 저를 인도하소서.” (시편 27,11)

나의 길이 주님께 난 길이길……. 우리가 걸어가는 이 발걸음의 끝에 주님이 서 계시기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어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어차 건너 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노래하면서 이 길을 걸어가 보자.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십자가의 길.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하는 길.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다 함께 비아 돌로로사!

그 길 끝에 당신의 초막이 있어라. 그늘이 되고 쉼이 되어주는 집. 밤에는 무수한 별이 반짝이는 집. 지붕에는 새들이 앉고 마당에는 꽃들이 춤을 추는 집. 고양이와 개가 풀밭에 노닐고 연못에는 개구리가 알들을 낳아 키우는 집. 다산초당처럼 우거진 숲이 건강한 지성을 품은 곳.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을 위해 예비된 그 초막에서 기도하고 싶어라.

북미 인디언 가운데 다코타 지방의 수족이 있다. 수족의 예언자 주술사는 부족과 멀리 떨어진 곳에다 천막을 짓고 그곳에서 홀로 기거했다. 그곳에서 과거를 보고 미래를 진단했다. 주민들과 ‘같이 살면서도 멀리 떨어져서’ 자신의 삶에 집중했던 곳. 초막에서 주술사는 환영을 보고 예언을 감지했다.

초막을 이으려면 갈대가 반드시 필요하겠다.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시인 로버트 번즈의 시 가운데 갈대는 싱그러운 후렴구로 사용된다. 마치 아가서와 같은 이 노래를 한번 불러본다.

“갈대는 푸르게 푸르게 자라네. 내 평생 가장 좋았던 시절은 어여쁜 내 님과 함께 보낸 때였지. 기나긴 세월에 언제나 봐도 뉘게나 있는 것은 근심뿐이라네. 만약 이 세상에 어여쁜 내 님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리야. 갈대는 푸르게 푸르게 자라네. 속된 자들이야 재물을 좇으라지. 재물은 안 잡힐라 도망치라지. 마침내 그들이 재물을 쥔다 하여도 그들 마음은 재물을 즐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겠지. 갈대는 푸르게 푸르게 자라네. 나는야 저녁 무렵 은밀한 때에 나의 님을 품안에 안고 있으면 그 남은 세상사나 속된 자들이야 바로 되건 외로 되건 상관이 없지. 갈대는 푸르게 푸르게 자라네.”

기와가 아니라 허술한 갈대를 얹은 그 초막, 세상에 가장 보잘 것 없어도 내 님과 함께라면, 주님과 함께라면 무엇이 부족하고 또 무엇을 부러워하랴. 당신은 비아 돌로로사를 따라 나에게 찾아오고, 나는 또 그 길을 따라 당신에게 찾아가리라. 언덕을 오르는 이 수고와 어려움쯤이야 당신과 얼싸 안을 생각에 다른 어떤 딴 마음도 가질 수 없다. 어기어차 어기어차.
 

 
 

임의진
시인. 남녘교회 담임 목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위원이다. 펴낸 책으로 <참꽃 피는 마을>, <예수 동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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