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편 읽기 - 23장]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시편 23장)

ⓒ임의진
‘야흐웨 로이’, 주님이 바로 내 양치기이심을 처음부터 노래한다. 셰베트(막대기)와 미슈에넷(지팡이)으로 나를 지키시는 분. 그러니 나는 배불리 먹고 안심하며 항상 잔이 가득 넘친다. ‘코시 르바야!’ 잔이 넘쳐흐르는 광경이 눈에 가득 들어오는 듯하다.

야훼, 엘, 엘로힘, 엘로아, 엘욘, 샷다이, 아돈(아도나이)……. 하느님의 이름 가운데 가장 우렁찬 이름은 역시 야흐웨(야훼).

로이는 양치기란 말이다. 양치기를 따라 살아가는 양떼인 우리들은 종 된 몸이렷다. 충성과 순명만이 있을 뿐. 그분은 슐라한(밥상) 르파나이(내 바로 앞에) 아락(차리시는) 하시는 분.

만개한 홍매(紅梅)가 밭에서 제 아무리 향기를 뽐내고 맵시를 자랑한다 하더라도 봄엔 거름으로 똥지기를 부어야만 밭농사로 먹고 살 수 있는 법. 더 깊고 더 분명한 사실은 주님이 겉으로만 말로만 보살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 한평생 은총과 복으로 돌보시는 분. 똥지기 거름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지시는 분.

이 세상 악다구니판에, 배신으로 가득 찬 황야의 시절에, 이토록 위로가 되는 말씀이 어디 또 있으랴. 빨리 중얼거리고 싶어 이를 돋아 세운 옥수수 낱알처럼, 어서 앞서고 싶어 빵빵거리는 뒤차처럼 신심에 찬 시인은 마음조차 바쁘구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우둘투둘한 길들이 곧게 펴지는 순간. 비루하고 초라한 생애마다 팔자를 고쳐주는 일성. 주님과 함께하면 두려울 게 없는 인생. 그러나 푸른 풀밭을 가기 전에 먼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용기 있게 지나가야 한다. 땀과 눈물, 바다가 짜고 따갑지만 건너지 않으면 약속의 땅에 닿을 수 없다.

다윗은 어려서 양치기였다. 그것도 사막이나 먼 들판에서 늑대와 여우와 산적 떼를 견뎌가며 양을 쳤다. 미쉬나에 따르면 “사람은 사막을 제외한 이스라엘 어떤 곳에서도 양과 염소를 치지 말 것”이 명시되어 있다. 오지에서 외롭고 추운 밤을 떨며 보낸 다윗. 다윗과 목동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긴긴 사막의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블레셋으로부터 독립투쟁을 이끌고 남 유다와 북 지파 동맹 간의 대타협을 통한 자주 민주 유일 정부를 수립한 다윗은 이 전진의 뿌리가 된 찬송시를,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켜내지 못했다. 성전 건축 등에 민중을 강제 동원하는 등 이른바 이스라엘판 개발시대, 신자유주의에 매진하고 만다. 후대 솔로몬 왕 집권시 가장 망조가 들게 되는데, 귀족들의 신분과 재산을 지켜주는 시스템으로 작동했던 바알 신앙이 뿌리내리고, 극심한 경제적 양극화 끝에 분단이라는 난국을 초래하고 만다.

푸른 풀밭은 어디인가. 양치기가 사막이나 먼 들에서 얼마나 애타게 찾아온 목초지겠는가. 그 푸른 풀밭에 걱정 없이 누워 노는 양떼들을 바라볼 때 양치기는 얼마나 보람찰까.

시인은 다시 그 시절을 회고한다. 작은 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날들을. 이제 정녕 돌아갈 순 없는 건가?
 

 
 

임의진
시인. 남녘교회 담임 목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위원이다. 펴낸 책으로 <참꽃 피는 마을>, <예수 동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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