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편 읽기 - 24장]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주께서 바다 밑에 기둥을 박으시고 이 땅을 그 물 위에 든든히 세우셨다.
어떤 사람이 야훼의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야훼께 복을 받고 하느님께 구원받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야곱의 하느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다.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야훼이시다. 싸움터에서 그 용맹 떨치신 야훼이시다.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영광의 왕은 만군의 야훼 그분이시다.
(시편 24장)

ⓒ임의진
히브리인이란 하비루, 아피루에서 나온 말로 맨발의 사람들, 목마른 자들, 나귀 고삐를 잡은 종, 배고픈 사람들, 도적떼, 포로들, 이방인들, 집시떼, 간첩 무리, 먼지 같이 이름 없는 자들, 돈에 팔려온 용병들, 땅 한 뙈기 없는 소작농으로 번역된다. 이들이 예언자 모세를 따라 얌수프(Yam suph) 갈대바다(Reed Sea)를 건너 야곱의 땅, 조상의 땅으로 대거 탈출하게 된다.

오래 전 야곱은 “내가 130년을 떠돌았는데 궂은 일만 있었다”(창세 47,9)고 말한다. 야곱의 인생도 히브리의 조상답게 떠돌이였다. 조상 때부터 모세까지, 그리고 시편의 다윗과 그 초기 왕권 시대까지도 천지간으로 떠돌며 주눅 들어 있는 그들이었다. 그때마다 싸움터에서 지켜주시는 신이 바로 야훼 주님이셨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용맹성을 높여주는 전쟁신 야훼를 신앙한 것만은 아니었다. 지혜가 또한 주님이셨다. 지혜 곧 호크마를 간절히 신앙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지혜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다”(잠언 8,17).

성전에는 앞문 스아림과 뒷문 핏득케가 있다. 머리를 드는 문은 ‘스아림’이고 일어서라는 문은 ‘핏득케’이다. 복종과 순종이 없는 지혜가 과연 가능할까? 이 문을 겸손하게 지나가야 비로소 지혜의 왕을 만날 수 있다. 지혜는 순종하고 순명하는 자에게 깃드는 선물이다.

사막의 교부인 휘페리키오 아빠스는 이렇게 말했다. “수도승의 임무는 순명이라오. 이것을 실천한다면 모든 기도가 응답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당하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을 것이지요. 주님 또한 죽기까지 순명하셔서 당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요.”

마천루의 유리창들이 불꽃으로 타오르는 월가의 자본은 세상을 굴복시킬 수 있을까. 한편 무고한 양민을 향한 폭탄 테러의 복수로 과연 정의가 실현될 수 있을까. 제국의 군대는, 그들의 용병은 세상을 지배할 뿐 지혜로 섬길 수 없다.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테러도 물론이다. 자복과 회개, 화해와 용서로 세상이 다시 평화로 반짝이기를…….

냉면을 삶는 여름의 행복과 단풍이 짙은 가을 역 기차의 연착을 즐길 수 없다면 불행한 인생이렷다. 생뚱맞게 지혜와 감성의 하느님이라니. 힘세고 용맹한 전쟁신인 하느님, 왕이신 하느님은 약하고 가여운 히브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겠지만 겸손한 앞뒷문을 통과해야 만나는 지혜의 하느님은 온 인류를 끌어안는다. 만왕의 왕, 신중의 신이 되시는 분을 찬미한다.
 

 
 

임의진
시인. 남녘교회 담임 목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위원이다. 펴낸 책으로 <참꽃 피는 마을>, <예수 동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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