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편 읽기 - 26장]

야훼여, 나의 무죄함을 밝혀주소서. 깨끗하게 살며 당신만을 철석같이 믿었사옵니다.
야훼여, 샅샅이 캐어보고 알아보소서. 속속들이 내 마음 뒤집어보소서.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쳐다보면서 당신의 진리 따라 살았습니다.
사기꾼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음흉한 자들과 벗하지 않았습니다.
악인들의 모임에는 끼이지도 않았고 나쁜 자들과 함께 앉지도 않았습니다.
야훼여, 손을 씻고 죄 없는 몸으로 당신의 제단을 두루 돌면서
나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 모두 전하며 고마우심 노래로 찬미하리이다.
야훼여, 나는 당신께서 사시는 집이 좋사옵니다. 당신의 영광이 깃들이는 곳이 좋사옵니다.
이 목숨을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 살인자들과 함께 이 생명을 거두지 마소서.
그들은 뇌물만 집어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자들입니다.
이 몸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사오니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주소서.
든든한 자리에 세워주신 일 감사드리며 예배하는 모임에서 야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시편 26장)

ⓒ임의진
“워샵티 브베트야웨 르오렉 야밈(나 야훼의 집에 돌아가리다).” 시편 23장의 목가적인 노래에 이어 26장은 당신의 집이 좋고, 그 영광의 깃대에 깃들어 사는 일이 행복임을, 그러기 위해선 세상이 공의로 가득차야 함을 간구하는 노래로 채워져 있다. 정녕 자기 소유의 집, 자기 노력의 성취로 이룬 영광으로는 맛볼 수 없는 하늘의 위로와 기쁨, 영광과 평안이 따로 있음을…….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니. …… 불행하여라. 부유한 사람들아! 그대들은 스스로 받을 위로를 받고 있으니”(루카 6,20.24).

그 어떤 성공과 자랑도 주님을 따르는 가난한 사람들의 위로와 기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허망한 것들이렷다. 이집트 수도승 성 안토니오는 말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

‘악한’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라샤’다. 신학자 반 르벤(Van Leuwen)은 이 악한 사람들, 악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더라. 첫째, 적대 관계에 있는 백성들. 둘째, 가련하고 연약한 사람을 억압하는 힘 있는 자들. 셋째, 동지였다가 배신한 자들.

시인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대개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허망한 사람들=사기꾼들(4절), 간사한 자=음흉한 자(4절), 행악자=므레임(5절), 악한 자=르솨임(5절), 죄인=핫타임(9절), 살인자=안쉐다밈(9절), 그 손에 악특(짐암=사악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한 자(10절).” (김정준 교수, <시편 명상> 참조)

시인은 온통 악인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더란 말인가. 헛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 허망한 사람들을 가리켜 신학자 다후드(M. Dahood)는 ‘우상숭배자’로 해석하고 있다. 하느님을 배신한 자들로 세상이 온통 칠흑처럼 어두운 시대…….

대통령은 세월호 선장을 향하여 천하의 악인이라고 호통을 친다. 하지만 불법적인 정보기관의 공작으로 권력을 찬탈한 것이 백일하에 이미 드러난 마당이다. 사고 전까지 모든 규제를 풀겠다고, 그래서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의 칼춤 마당을 만들던 이는 과연 누구인가. 누가 하느님(곧 인민 백성)의 목숨을 헛되이 외면하고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0% 구조 실력을 보여주었는가. 누가 국격을 땅바닥에 떨어뜨려 짓밟게 만들었는가.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국가개조라는 망측한 독재 망령을 입에 담으며 죄 없는 국민을 겁박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죄란, 악이란, 국가가 국가로서 노릇을 하지 못할 때 화산처럼 분출하는 폭력을 말함이다. 성서는 인간의 개인적 죄보다는 사회적 죄에 우선적으로 관심한다. 어긋난 사회의 구조 틀은 죄인을 양산한다.

정녕 주님보다 더 나은 것을 두지 말 일이다. 로마의 침략 이후 갈릴래아 민중들은 3년간 처절한 게릴라 투쟁으로 일떠섰다. 특히 로마 제국의 신상이 그려진 군대 깃발을 앞세우고 대대적인 행진을 시도하자 치욕스러운 그 짓에 공분하기 시작했고, 로마 군대는 시위하는 백성들을 구속하고 고문하며 위협했다.

로마 황제 가이우스는 유대교의 하느님을 대하듯 자기에게 대하라며 도처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절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갈릴래아 민중들은 히스기야의 아들 유다를 중심으로 농민군을 조직하고 로마에 치열하게 응전했다. 도시를 중심으로 유다가 도심 게릴라전을 주도했다면 산악지방에서는 아쓰롱게스 형제가 용맹스러운 전투를 이어갔다. 주님보다 더 나은 것을 두지 않으려는 갈릴래아 백성들의 기도와 항전이 없었다면 예수는 갈릴래아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메시아에 대한 염원, 좋은 세상에 대한 염원……. 오로지 이 한 뜻, 한 맘으로 역사의 길을 걸어가는 시인이여. 민중의 눈물을 씻으며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주소서.” 탄원할 때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한결같은 사랑에 마음 이끌리어 오로지 외사랑, 당신만을 의지하고 따르리니 어떤 유혹도 두려움도 우리를 흔들 수 없음이렷다. 주님보다 더 나은 것을 두지 않으려는 이 각오, 이 다짐. 영원하리다. 아멘.
 

 
 

임의진
시인. 남녘교회 담임 목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위원이다. 펴낸 책으로 <참꽃 피는 마을>, <예수 동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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