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목마른 시대의 ‘미사’를 성찰한다 - 마지막 회

교회가 성전에서 거행하는 전례는 세상의 삶과 무관한 것일 수 없다. 교회는 신도들이 자기만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을 넘어,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 제물로 내놓은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까지 희생 제물로 내놓은 하느님처럼, 자기를 또한 희생 제물로 바치게 해달라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집이다.

교회는 자기 구성원의 세속적 욕구(‘부자 되게 해 달라’,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해 달라’)를 충족시키는 기구가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 제물로 내놓은 그리스도의 성사이며, 구원의 도구이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실”(1코린 11,27.29) 때 교회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

교회는 자기의 신자들에게 자주 미사에 참여하여 성체를 영하라고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성체를 영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시대적 사명임을 일깨워주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미사를 의무화한다면 자기희생을 의무화하는 것이며 온 인류를 이 희생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활성화를, 서로를 위해 얼마나 자기를 쪼개고 나누고 희생하는가보다, 주일 미사 참례자 수로 평가할 때가 많다. 그래서 주일 미사 참례자 수를 세어 상부에 보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일치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를 위하고 나누며, 나아가 교회 밖의 사람들과도 나누는가에 달려 있다. 얼마나 이웃의 슬픔과 괴로움을 자신의 슬픔과 괴로움으로 삼는가에 달려 있다.

모든 신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례하여 영성체를 한다고 해도, 저마다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공동체는 이기적인 집단일 뿐, 세상의 평화를 위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근본 이유는 자기의 행복이 아니라 세상의 평화를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의무화하면서도 미사가 본래 지향하고 있는 세상의 평화를 위한 자신의 희생에 대해서는 덜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교회 자체가 세상의 평화를 위한 희생적 도구 역할을 다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교회는 자기가 신자들에게 강조하는 대로 스스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스스로 이 일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와 기도는 이기적인 것이 되고, 이런 기도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는 위선적인 집단이 될 것이다.

▲ 사진 제공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교회는 세상에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이를 보여주어야 한다. 자기가 왜 구원의 성사인지 깨닫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자기 존재로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자기가 무엇 때문에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지,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자기가 신도들과 세상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깨닫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자기의 신자들에게 미사를 거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스도의 삶과 이 삶을 사는 모습을 자기 존재로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성체성사 예식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전례’와 ‘세상 안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기의 존재로 보여 주어야 한다.

“성체성사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적인 일치나 전례적인 형식뿐만이 아니다. 성체성사는 참여하는 공동체의 통교를 기념하고 전례 속에서 뿐만 아니라 삶 전체 속에서 그들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만 공의회가 교회를 구원의 도구로 이해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자들이 성체성사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의 현존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성체성사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 데이비드 몰란드, ‘성체성사와 정의―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 <영성과 활동의 관계>, 참사람되어, 2012)

그리스도는 성체성사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를 희생하며 만물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을 온 인류에게 체험하게 하는 하느님의 성사이며, 교회는 이 그리스도를 인류에게 체험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성사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사임을 깨닫는다면,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성사임을 깨닫는다면, 그분이 세운 성체성사가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기존의 예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거행하신 성찬례는 겉으로는 구약의 종교 예식과 같아 보이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구약의 종교는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존재를 잡아 희생 제물로 바쳤지만 예수님은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잡아 바치셨다. 구약의 희생제에서는 제물과 사제가 달랐지만, 신약의 성찬례에서는 희생 제물이 사제요 제단이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이 공동체는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남자도 여자도, 노예도 자유인도 없는 새로운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 소외되고 짓눌린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한 공동체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초대받고도 거부한 사람들 대신 이곳저곳에서 모아온 사람들로 가득 찬 결혼 잔치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미사에 참여하는 이는 하느님이 사자를 보내어 이곳저곳에서 모아온 사람들이다. 우리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께 초대되었다.

교회가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곳이라면, 교회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가 성체성사를 올바르게 기념한다면 교회 자신만을 유지시키기 위한 모든 능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야 한다. 세상 식으로 말한다면, 교회 자신의 생존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고통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발을 씻어주고’ 그리스도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했던 것과 똑같은 과제를 선택해야 한다. 빵을 쪼개는 데에 참여하는 신자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닮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기를 바라는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다. 기득권과 유지에 필요한 걱정, 그리스도에게는 가짜 안전이었던 것들로부터 그리스도처럼 발가벗기는 것을 의미한다.” (* 앞의 책, 데이비드 몰란드의 글)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므로 희생의 제사는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인간 해방의 도구이자 상징이라 한다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 육화의 연장이라 한다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자기포기를 기념하고, 그분의 희생을 자신 안에 현존시키는 것은 바로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이다. 이러한 진리의 의미는 미사 중에 세상을 위해서 하는 ‘신자들의 기도’라는 순전히 신심적인 차원만으로 표현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 기억되고 있는 것이 세상 속에서 그것을 기념하고 있는 공동체에 의하여 실천되어야 한다.” (* 앞의 책, 데이비드 몰란드의 글)

성체성사는 교회가 세상 안에서 인류의 아픔과 고통, 슬픔과 괴로움을 듣고 있다는 것을, 또 들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가 성체성사를 세상에서 가난하고 억압 받는 이들을 위하여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거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체성사는 세상과 격리된 곳에서 거행되는 전례용이 아니다. 오히려 전례가 세상 한복판에서 거행되어야 함을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체성사는 정치적인 면도 지닌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그들을 위한 신자들의 기도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교회가 참회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개인적인 참회를 넘어 얼마만큼 남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는가, 혹시나 자기만의 행복을 위하여 살면서 이웃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요구한다. 교회도 참회를 해야 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위기를 자초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물질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하더라도 이기적으로 발전한다면 그보다 더한 위기가 있을까?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배만 불리면서 평화를 바라는 것이 위기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미사를 드리는 교회 또한 이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부와 명예를 위하여 기도하는 이들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때 공동체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성체성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이제민 신부 (에드워드)
마산교구, 명례성지 성역화 추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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