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목마른 시대의 ‘미사’를 성찰한다 - 1

국정원 사태 해결을 위한 시국미사뿐만 아니라 강정마을, 밀양 등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현장에서 계속되고 있는 미사에 대해 이제민 신부(마산교구 명례성지 담당)가 신학자로서 성찰해 집필한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 글을 4번에 나누어 싣습니다. ―편집자

국정원의 대선 댓글 의혹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혼란한 시국 상황에서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국정원의 개혁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선언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그 이전부터 이미 용산, 제주의 강정, 밀양 등에서 끊임없이 시국미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두고 교회가 왜 현실정치에 깊이 개입하는가, 사제들이 왜 길거리에까지 나와서 시위를 하는가 하며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마저 그러하여 시국미사는 종전처럼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에 천막을 치고 그 자리를 지키며 미사를 봉헌하는 동료 사제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

길거리에서 종교 의식인 미사를 드리는 것이 정당한가 묻기 전에 우리는 그곳에서 거행되는 미사가 무엇인지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미사의 의미를 안다면 미사를 드리는 곳이 성전이라는 건물에 제한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미사는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의식이다. 이 미사는 이미 그리스도 이전 하느님의 자기희생에 기인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당신의 생명을 세상에 전달해주셨다. 인간이 아무리 사악하게 굴어도 하느님은 그들 마음 안에 살아계신다. 사람들은 악한 인간을 보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벌해주기를 바라지만, 하느님은 그들 마음 안에 살아계신다. 하느님이 그들 마음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편에서 하느님의 이 사랑을 실천하셨다. 사제 가문이 아니었지만 이웃(온 인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이 자기희생이 그분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먹어라.” “이는 내 피다. 너희를 위하여 흘릴 피다. 받아마셔라.” 그분은 스스로 제물이며 제단이며 사제였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자료사진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이를 통해 하느님의 자기희생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처럼 또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며 이웃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자기희생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을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세상에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황소와 염소 등 다른 존재의 피를 제단에 뿌리며 하느님과 화해하고자 한 구약시대와는 달리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잡아 희생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과 함께 자기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내놓기 위해서이다. 미사를 드리는 이는 그들 자신이 제단이며 희생 제물이며 사제인 것을 안다.

미사는 자기만의 부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자기희생과 나눔만이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인류를 자기희생으로 초대하는 잔치다. 이 잔치에서 그리스도인이 쪼개진 성체를 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쪼개고 희생하며 나누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이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 하며 나누어주는 성체를 받으면서 “아멘” 하고 응답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온전히 녹이며 우리 몸 안에 들어오셨듯이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성체처럼 녹이며 이웃 안으로 들어가 사라지겠다고, 성체로 세상을 살겠다고, 거기에 세상의 평화가 있다고 응답하는 것이다. 미사는 자기희생이 없이는 달리 이 세상에 평화를 강물처럼 흐르게 할 수 없다는 진리를 일깨워 준다.

자기희생 없이 이웃의 행복과 세상의 평화에 기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미사의 핵심이다. 우리의 행복과 세상의 평화를 원하시는 하느님은 가난하고 고통 받고 소외된 인간,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의 마음 안에, 그들의 살과 피 안에 현존하신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이들의 살과 피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분의 죽음을 기억하는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하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주신 그분처럼 우리도 이 말을 하며 가난한 이, 소외 받은 이들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그 마음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 얻을 것을 생각하는 데 익숙해 있는 현대인은 부와 명예를 자기의 존재 안에 쌓으려는 욕심으로 더 큰 창고를 짓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고는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는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돈과 권력의 유혹이 커서 자기희생과 나눔을 강조하는 것이 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은 남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행복을 희생할 줄 아는 존재이다. 부와 권력과 명예, 이런 것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족하다 하더라도 인간은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재물과 권력을 자기를 향하여 쌓을 때는 불행의 늪에 빠져들기 일쑤이지만, 남을 향하여 자기의 존재까지 나눌 때 인생이 풍족해진다는 것 또한 안다.

나눔의 삶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본래 인간은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시며 우리를 격려하신다. 혈연과 지연, 학연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라. 실제로 우리는 자기희생과 나눔의 삶을 살고 있다. 부모의 자식 사랑, 자식의 부모 사랑, 부부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은 자기희생의 토양에서 나온 행위이다.

어찌 이 위대한 사랑을 가족 안에만 머물게 하겠는가. 이를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묶어두려고 할 때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으로 변질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만나는 세상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대하시는가 하면 모든 이를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 자매로 대하셨다(마르 3,31-35).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나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로 만날 때, 우리는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가족 사랑의 심장에는―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인류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인류애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사랑은 순수하지 못하다.

천주교 신자들은 성체를 영하기 전에 사제가 “이 성찬에 초대를 받은 자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자기를 희생하며 나누는 자만이 인생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자기희생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은 행복을 원하는 자는 당연히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처럼 자신의 몸을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내놓기 위해서 미사를 드린다. (계속)
 

 
이제민 신부 (에드워드)
마산교구, 명례성지 성역화 추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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