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목마른 시대의 ‘미사’를 성찰한다 - 3

성체신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이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마음을 발하게 한다.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분처럼 살겠다는 마음을 발하게 한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먹어라” 하는 말은 사제만이, 그것도 교회의 전례 안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을 전례용으로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구실로 더 이상 자기는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해석하며 편하게 사는 방식을 찾으려 하는 것은 성체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성체를 영하면서도 자기를 쪼개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끌어안고서도 십자가를 지지 않고 안락하게 사는 꿈을 꾸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묵상하면서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봉헌하겠다는 마음이 발발하지 않는다면 이는 잘못된 신심이다.

아무리 밤샘을 하면서 성체 앞에 꿇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이 마음이 이웃 사랑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성체 앞에 앉아 있는 동안만 유효하다면, 그 밤샘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체신심은 예수님의 관심을 나의 관심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웃에 대한 관심이다.

▲ <사도들의 영성체> 세부, 프라 안젤리코, 1452년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으로 내놓으신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으면서 자신의 안위와 행복과 구원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이들은, 바오로가 당시 코린토 공동체 신자들을 질책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1코린 11,20). 그들은 주님의 고난은 기억하지 않고 자기 배 불릴 생각만 하며 성찬례에 참석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몸을 먹으면서도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1코린 11,21)하였던 것이다.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온전하고도 완전한 자기희생과 나눔과 사랑을 기억한다면 서로 많이 먹으려고 다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몰염치한 짓인지 알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바오로는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으며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2) 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바오로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오로 자신이 그분의 자기희생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 점을 다시 상기시킨다.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1코린 11,23-26)

어찌 그 몸을 자기만을 생각하며 먹을 수 있겠는가. 그런 마음으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7.29).

매일 영성체를 하여도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조금도 희생하지 못한다면, 희생 대신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만 바친다면, 어찌 온 인류의 평화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주님의 몸을 합당하게 모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성체를 영하기 전에 서로 나누는 평화의 인사가 전례의 한 부분이기만 하다면, 어찌 그 평화를 그리스도의 피로 주어진 평화라 할 수 있겠는가. 미사를 개인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여기는 풍토는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미사를 잔치로 이해하는 데 이의가 없다. 미사가 잔치라면 미사를 통해 우리는 나눔을 접하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을 꾸짖었다면 그런 나눔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눔이 없는데 어찌 그 모임을 사랑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기 먹기에만 바빴고, 자기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고, 형제의 배고픔이나 가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해 모인 사랑의 공동체라면 마땅히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함께 나누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몸에 십자가를 긋는 것은 그분처럼 고난 받고 죽기 위해서이며, 집에 십자가를 모시는 것은 그분처럼 나도 십자가의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십자가를 하나의 부적처럼 몸에 달고 사는 것은 아닌가.

(계속)
 

 
 

이제민 신부 (에드워드)
마산교구, 명례성지 성역화 추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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