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목마른 시대의 ‘미사’를 성찰한다 - 2

이 희생제사는 성전 안에만 제한되어 봉헌될 수 없다.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그리스도의 미사)의 현장은 마구간이었고, 그분이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며 미사를 봉헌한 곳은 성문 밖 십자가였다.

그분께서 많은 구경꾼들이 조롱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하늘에 바칠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희생제사의 절정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온 우주가 마음을 찢으며 그분의 희생 제물을 받아들인 것이다.

성전의 휘장을 찢는 그분의 희생제사에서 인류는 사랑을 느꼈고 평화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을 보았다. 미사는 가난하든 부자든, 힘이 있든 없든 모든 인간을, 종족과 언어와 혈통을 넘어 온 인류를 자기희생으로 초대하는 전례이다.

그분의 자기희생을 기억하는 미사는 성전의 휘장을 찢으며 온 인류의 마음 안으로 거행되는 희생 제사이다. 온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게 하는 미사는 그 성격상 성속을 가리지 않고 세상 어디서나 봉헌되어야 한다. 일정한 시간에 성당이라는 일정한 장소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은 세상 어디서든 미사를 드리기 위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시국미사*를 드리는 것은,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지 못하고 자기만의 안일과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시국을 향하여, 자신을 희생시킨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며 세상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초대하기 위함이며, 세상 모든 이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사제적 존재로 초대하기 위함이다.

(* ‘시국미사’라는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용어이다. 그만큼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교회의 모습을, 성체의 삶을 보여주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박홍기

미사는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 없이 자기의 안위와 행복을 위하여 남을 희생시키려는 마음으로는 드릴 수 없다. 사제들이 현장에서 시국미사를 드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돈과 권력에 사로잡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약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거민, 쌍용차 사건, 밀양 송전탑 사태 등은 자기를 희생하지 못하는 마음, 남을 희생시켜 자기의 배를 불리려는 구조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자기희생의 소리가 터져 나와야 한다.

미사는, 즉 자기희생은 예식으로만 끝날 수 없는 삶 자체다. 성전에서 시국을 위한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같은 이유로 이 소리는 성전 밖에서도 울려 퍼져야 한다.

미사를 성전 안에서만 드려야 한다는 주장은 미사의 핵심을 모르는 데서 나온 소리다. 우리는 자기희생을 성전 안에만 가두어 놓을 수 없다. 현장에서 드리는 미사에서 우리는 온 인류가 자기희생에 초대 받았음을, 시대가 자기희생을 목말라하고 있음을 읽어야 한다. 시국미사를 일종의 정치적 시위로 간주하려는 것은 미사의 이런 희생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제는 성당 안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온 우주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온 우주와 함께 미사를 드린다. 미사는 온 우주가 자기희생의 바탕에 근거하고 있음을 선언하며 온 우주를 희생으로 초대하는 제사이다. 그러기에 자기를 희생 제물로 내놓지 못한 미사는 미사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세상의 평화는 자기희생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미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세상의 평화를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에서 말한다.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왜냐하면 사도직 활동의 목적이 신앙과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가 한데 모여 교회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희생제사에 참여하고 주님의 만찬을 먹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례헌장 10항)

여기서 전례 행위는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 행위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하신 것은 일주일에 한번 성당에 모여 당신의 몸을 나누면서 당신을 기억하라는 명령 이상이다. 이 말씀은 미사 중에만 사제의 입을 통해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예식에 참례하는 모든 이가―아니,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라도― 일상에서 마음에 새겨야 하는 삶의 방향을 담고 있다. 아무리 주일을 거르지 않고 열심히 미사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밤샘을 하면서 성체조배를 한다 하더라도, 일상에서 자기의 살과 피를 이웃과 나누지 못하는 인색한 삶을 산다면 주일을 지키고 성체를 영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체를 영하는 신자는 자기의 몸을 성체로 주신 그리스도처럼 또 다른 성체로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자기의 살과 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이웃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쪼개고 희생하면서 이웃의 몸 안으로 녹아들어가는 행위가 어찌 전례를 행하는 중에만 일어날 수 있겠는가. 미사는 그 성격상 교회의 전례 안에 갇혀있을 수 없다.

자기희생, 신자들의 사제 직분은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방향이다.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평화를 원한다면 자기희생을 근본으로 삼고 미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야 한다. 자기희생이 사라진 사회는 자비로울 수 없고, 그렇기에 평화로울 수 없다. 미사는 자기의 행복을 빌기 위해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자기의 행복을 포기한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는 희생제사이다.

그리스도인이 대사제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영하는 이유는 자기만의 구원, 자기만의 행복을 넘어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처럼 대사제로 세상을 살기 위해서이다.

이를 전례헌장은 이렇게 말한다. “전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전례 안에서 인간의 성화가 감각적인 표징들을 통하여 드러나고 각기 그 고유한 방법으로 실현되며, 그리스도의 신비체, 곧 머리와 그 지체들이 완전한 공적 예배를 드린다.” (전례헌장 7항)

미사는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전례를 넘어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쪼개며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이며(ecce!) 세상이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시위이다. 그리스도는 성전 안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들판에서, 만민이 보는 앞에서 돌아가셨다. 미사는 만민을 이 현장으로 초대하는 초대장이다.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을 때, 세상을 향하여 평화의 빛이 발할 것이다. 미사 때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이 성찬에 초대받는 이는 복되도다” 하고 외치는 사제의 소리는 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모인 자들을 향한 소리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다.

세상의 정의와 평화는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희생으로 내놓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찌 이 미사가 성전 안에서만 행해지는 전례이겠는가. 미사는 세상을 향한 소리이면서 미사를 드리는 사제 자신을 향한 소리이기도 하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모두가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평화와 정의를 외치는 소리는 자기를 희생하는 일이 없이는 공허할 뿐이다. 세상을 위하여 초대하는 자기희생에 응하는 자가 드디어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행복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례헌장을 통하여 “사람들이 전례에 나아갈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신앙과 회개로 부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9항)며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는 것도,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한 삶, 일상에서 성체의 삶을 살지 못한 신자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여, 한 분이신 참 하느님과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자신의 길에서 회개하고 참회를 하게 한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신앙과 참회를 권고하여야 하고, 더 나아가서 성사들을 받도록 준비시켜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고, 애덕과 신심과 사도직의 모든 활동으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그러한 활동으로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 세상에 매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상의 빛이 되고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야 한다.” (전례헌장 9항)

(계속)
 

 
 

이제민 신부 (에드워드)
마산교구, 명례성지 성역화 추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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