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사제 - 3] 올리비에 베랑제 주교

제주에서 두 차례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앉아있을 때, 전화가 왔다. 30년 동안 내 가슴에 삶의 아버지로 간직된 오영진 올리비에 주교님께서 서울에 오셔서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하셨다. 호주 시드니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에 참석하셨다가 당신이 동반하고 있는 프랑스 쌩드니 교구의 청소년들과 함께 독산1동성당에서 4박5일을 지내고 가신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신학생들을 지도하고 계셨던 올리비에 베랑제(한국 이름 오영진) 신부는 1970년대 한국 노동사목을 위해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초대되었고, 당시 우리 가족들이 살았던 영등포의 도림동성당 보좌신부로 계시면서 JOC(가톨릭노동청년회)와 함께하셨다.

비행기에 올라 서울로 돌아오는 1시간 동안, 30여 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1977년 봄. 버스 운전을 하시던 숙부의 잦은 사고 처리와 가진 것 없어 가난하기만 한 다른 형제들의 뒤치다꺼리, 그리고 우리 칠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 논밭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버린 아버지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을 하셨다. 그때까지 우리 가족의 생계를 지켜주었던 오일장도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과 함께 들어온 슈퍼연쇄점에 밀려 다 무너지고 말았다. 오일장에서 팔다 남겨진 생필품으로 집 앞에 다시 구멍가게를 차려놓았고,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룹과외와 입주과외를 비롯하여 음악다방 가수에서 카바레 악단의 피아노 연주까지 돈이 되는 일이면 몇 가지씩 겹치기를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도왔고, 학업 또한 멈추지 않았다.

서울에 사는 가족들의 가난은 더욱 눈물겨운 것이었다. 호남 지방의 가난한 사람들이 밀려들었던 영등포 도림동 모랫말 시장 입구에 있는 쌀가게 이층 단칸 사글셋방에서 아버지와 여동생 그리고 두 명의 남동생이 함께 살았다. 가난이 원인이 되어 스무 살을 갓 넘긴 동생이 술을 많이 마시고 철길을 걷다가 사고로 죽은 다음, 어머니는 할머니를 모시고 서울 가족과 합치셨다. 혼자 시골집에 살면서 대학을 마친 후, 군 입대 중 성소를 느껴 ‘프라도 사제회’에 지원하여 관심자로 지내던 내가 아버지 신부였던 그분의 지도와 권고로 가정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우리 가족들의 가난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영적 지도신부였던 그분은 나를 가정으로 파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로제가 프라도 사제를 지망하는 이유가 ‘가난한 사람과 함께하는 삶의 연대’라면 그 성소는 자신의 가정 안에서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내가 서울에 와서 살았던 8년 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로제의 가족들 또한 무척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가난한 집안에서 장남이 어렵게 대학공부를 마쳤는데 신학교로 가버린다면 남은 가족들은 희망을 잃게 되고, 그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학교 편입을 주선하고 계셨던 본당신부님과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셨던 주변의 여러 신부님들께서 ‘외국 신부들이 한국 사정을 잘 몰라서 그러니 집안 걱정하지 말고 신학교로 가라’고 모두 입을 모으셨지만, 나는 내 아버지 신부님의 권고에 따르기로 했고, 가정으로 돌아왔다.

▲ 올리비에 베랑제 주교와 함께 ⓒ김정식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 잠깐 들렀다가 그분이 계시는 곳으로 찾아갔다. 성당 입구에서 담소를 나누고 계시는 그분을 본 순간 연로한 모습에 가슴이 아려 왔다. 서울에서 가난한 이웃들과 동반했던 것처럼 프랑스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쌩드니 교구에서 여전히 가난한 삶을 살아오셨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연령대인 청소년들과 함께하고 있는 주교의 얼굴은 평온과 행복 그 자체였다. 그렇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한 삶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들과 함께하기(연대)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20여 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어려워 보이는 한국말로 그분이 물으셨다.

“너. 여기서 한참 동안 있을래? 방금 갈래?” (금방 가야 하니? 시간이 좀 있니?)

아마도 저녁 전례 중에 당신과 함께 온 청소년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날 전례를 마친 후, 샤를르 드 푸꼬의 ‘의탁의 기도’와 함께 불렀던 이 노래는 그분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부르는 동안 나도 모처럼 평온과 행복을 누렸다. 여전히 아들처럼 대해주시는 사랑이 감동을 주었고, 여러 가지로 부족하기만 한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마음을 알아차렸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나 또한 25년 전, 파리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 공부를 하기 위해 난생 처음 유럽에 갔을 때, 맨 먼저 찾아갔던 곳이 그분의 생가와 어린 시절을 지냈던 성당이었다. 파리 근교 베르사이유로 가서 홀로 사시는 모친을 뵙고 그분이 사셨던 마을을 둘러봄으로써 얻은 영감은 가난을 살고자 하는 내 열망을 잘 채워주었다. 신부님은 어린 시절 베르사이유 궁전 정원을 마당처럼 여기며 놀았다고 한다. 궁에 들어가는 것은 유료이지만 정원에서 노는 것은 무료였기에.

가난한 형제들을 더욱 사랑하시는 아름다운 신부님
천진한 어린이의 친구 되시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멋쟁이
예수님 지고가신 사랑의 십자가 매일 지고 가시는
신부님 신부님 올리비에 신부님 우리도 신부님을 사랑해.

소외당한 이들의 벗이 되어 주시는 아름다운 신부님
무거운 짐 진 사람 도와주시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신부님
예수님 사랑을 생활에서 보이는 사랑의 십자가
신부님 신부님 올리비에 신부님 하느님의 크신 은총 당신께.

(김정식 사 · 곡, ‘우리들의 올리비에 신부님’ 가사 전문, 김정식 로제리오 생활성가 5집)

생각난다. 추석 명절에 제사 드리는 모습이 보고 싶다며 함께 차례를 지내면서 우리 조상께 절도 올리셨던 신부님. 성당에 나갈 여유조차 없었던 가난한 내 가족들과 연대하여 가톨릭교회로 초대하고, ‘함께하는 삶’의 감동으로 세례로 이끌어 주신 신부님. 프라도 사제회 관심자 시절, 가난한 우리 집 형편을 염려하셔서 나를 취직시켜 주시려고 CCK 책임자 신부님께 청탁을 드려주신 신부님. 구로동성당 사제관에서 함께 지낼 때 외출 시에는 토큰 4개를 꼭 쥐어 보내시며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셨던(자주 타고 다니셨기에) 시내버스 노선을 자상하게 알려주셨던 인자하신 신부님.

미사가 끝난 후면 이마와 뒤꼭지가 튀어나왔다는 이유로 초딩들로부터 “짱구야!”라는 놀림을 받았던 신부님. 국회의원에 당선된 우리 본당 교우가 “신부님께서 기도해주셔서 당선될 수 있었기에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런 기도는 한 적이 없어 미안하다”고 하셨던 신부님. 난장판으로 떠들어대는 유아세례 미사 강론에서 “많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활기를 보여주어서 행복합니다.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고, 생명이 있어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시면서 행복해 하시던 신부님. 가난한 사람을 사랑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 아~ 사랑하는 나의 신부님. 나의 아버지!


김정식
(로제리오)
생활성가 가수 겸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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