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사제 - 1] 강영구 신부

사제 성화의 날에 즈음해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기고문들을 연재합니다. ― 편집자

부활 제4주일은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 부르는 성소주일이었다. 그날 대부분의 교구와 본당에서는 하느님의 부르심 중에서도 특별히 사제성소 증진에 대하여 기도하고 관심을 모은다. 그 날 신부님은 그에게 할당된 지면(가톨릭마산 2041호 제언)을 통하여 그렇게 말했다.

“신도들은 사목자요 사제인 나를 목자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목자가 아니다.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적이 없다. 나는 양 무리 가운데 한 마리 양일뿐이다. 목자는 예수님밖에 없다(마태 23,8-12). 사목자는 글자 그대로 양 치는 일(牧)을 위탁받은(司) 사람(者)을 일컫는 말이다. 양을 돌보고 이끌고 살리는 일은 참 목자 예수님의 일이다. 사목자는 목자가 될 수 없고 스스로 목자의 자리를 차지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도둑이나 강도가 되면 안 된다(요한 10,9).”

신부님을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서 바라보며 20여 년을 사는 동안 그는 한결같이 참 목자 예수님에게서 위임받은 일에 충실한 사목자였다. 신부님은 그것으로 행복해 했고 행복에 겨워했다. 그는 그런 분이었다.

 ⓒ김용길

로마 라테란대학에서 사목신학 공부를 하고 돌아온 신부님이 내가 있던 본당의 주임신부로 부임했을 때 나는 갓 서른을 넘긴 청년이었다. 신부님도 젊은 시절이었지만 나는 그야말로 좌충우돌, 질풍노도 같은 시절이었다. 본당 청년회에서 만난 커플들은 결혼하기 전 청년들 앞에서 이른바 댕기풀이를 하던 전통(?)이 있었는데 내가 발바닥을 두들겨 맞던 날도 신부님은 자리에 끝까지 앉아 있었다. 신부님은 나의 혼배 주례사제였다.

결혼을 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님은 나에게 본당 평협 임원을 하라고 말했다. 지금은 많은 본당에서 청년들이 당연직으로 들어가는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젊은이가 감히(?) 평협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파격이었다. 결국 권유도 권유지만 닭벼슬보다 못하다는 교회벼슬이 탐나 신부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의 성질머리가 오래 가겠는가? 평협 회의 때마다 나이 많은 어른들과 충돌하고는 했다. 한번은 중고등부의 예산 문제와 관련하여 본당 부회장과 의견이 엇갈려 의자를 박차고 나왔다. 그날 평협 회의는 나로 인해 아수라장이 됐다. 물론 신부님이 앉아 있었던 자리였다. 그 다음 날인가 사제관으로 사죄를 하러 찾아갔다. 신부님은 한마디만 했다. “괜찮아. 할 말 한 거야. 그런데 조금만 침착하면 좋겠어.” 그는 그런 분이었다.

신부님은 늘 침착했다. 결코 서두르는 모습을 신자들에게 보인 적이 없다. 차를 타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시동을 걸기 전 당연히 안전벨트였으며 두 번째는 손에 흰 장갑을 끼는 일이었다. 한동안 그런 모습이 나에게는 어떤 강론이나 말씀보다도 살아있는 공부였다. 어린이들을 위한 강론을 좀 더 아이들 눈높이에서 생각하려고 이솝 우화 전집을 곁에 두신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그런 강론을 듣고자 일부러 어린이 미사를 참석하는 어른들이 생길 정도로 신부님의 말씀은 늘 쉽고도 감동적이었다.

신부님은 그의 강론집 머리글을 통해서 그렇게 고백했다. “저는 본당에서 사목을 하는 동안 원고 없이 강론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강론 원고를 꼭 준비했던 이유는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서서 횡설수설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강론은 사제에게 주어진 큰 십자가이며 동시에 보람입니다. 사제는 말씀을 선포해야 할 책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실히 강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늘 교우들 앞에서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강론을 했습니다. 번지르르한 말에 비해서 저의 삶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입니다.”(<형제자매 여러분>, 가톨릭출판사, 1995)

신부님은 늘 강론의 첫마디를 “형제자매 여러분”이라는 살가운 말을 던지면서 시작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그 날 선포된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전했다. 때로는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또 때로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마치 음악 한 곡을 연주하듯 늘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런 강론은 하는 사람보다는 듣는 사람이 더 느낄 수밖에 없다. 그는 그런 분이었다.

신부님은 언제가 부터 그의 아호를 한밝음 혹은 일명(一明)으로 사용했다. 아마도 신부님의 삶을 비추는 가장 적당한 이름일 것이다. 낙동강변의 봉쇄 수녀원 지도신부로 계시던 시절 신부님을 가족들과 함께 찾아가자 신부님은 손수 쑥국을 끓이고 그때는 아직 어렸던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 삼겹살 고기까지 준비해서 점심상을 차려주셨다. 물론 식복사 없이 혼자 사셨다.

부산가톨릭대학 교수를 하시던 시절에 신부님은 송광사에서 하는 단기 출가 선수련 법회에 참여했다. 그가 굳이 그곳에서 천주교 사제의 신분을 밝혔는지 안 밝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신부님은 그곳에서의 날들을 10년이 지나 송광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송광사>(2007년 9월호)에서 ‘4박5일의 행복’이라 적었다. “수련기간 내내 아침마다 예불대참회문을 외우면서 부처님의 명호를 불렀다. 108배를 할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절을 하며 내가 명호를 부르는 바로 그 부처가 되리라 다짐했다. 참나(眞我)는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허위의식들을 벗어버릴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오라. 몽둥이든 회초리든 꼬챙이든 오라. 참나를 찾는 방편으로 삼으리라.” 그는 그런 분이었다.

혼배 미사 때 찍은 사진이 이젠 제법 오래되어 색이 바랬지만 신부님의 강론 한마디는 아직도 나를 늘 일깨우고 있다. 강론 말미에 신부님은 나와 아내의 이름을 또박또박 부른 후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하여 결혼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시작입니다.” 그 이후 20여년을 지나는 동안 아내와 나는 결혼기념일 케잌에 불을 밝힐 때 마다 그 말씀을 새기고 있다. 마치 강허달림이 부른 ‘우린 정말 사랑했을까’을 반성하면서 듣는 것처럼 말이다. 어찌하다보니 나도 벌써 세 번이나 후배들의 결혼 주례를 서게 되었는데, 나는 주례사 말미에 늘 신부님이 했던 말을 빠지지 않고 전했다. 마치 한처음에 말씀(요한 1,1)이 대를 이어 전해지는 것처럼.

신부님은 지난 성소주일 때 “나의 사제 생활 38년을 되돌아본다. 나는 자주 예수님을 가로막고 서서 내가 목자인양 행세했을 뿐 아니라, 양들이 목자 예수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적이 많았다. 양의 탈을 쓴 게걸 든 이리(마태 7,15)였던 적도 있었다. 부끄럽고 미안하다”(가톨릭마산 2041호 제언)라고 고백했다. 신부님의 고백은 그만의 고백이 아니라 지금여기에 사는 모든 믿는 이들의 고백처럼 웅웅거렸다. 그는 그런 분이었다.

오래도록 비빌 언덕으로 계셔준 신부님께 “고맙습니다” 한마디만 돌려 드리고 싶다. 내 인생에 잊지 못할 신부님은 마산교구 총대리 강영구 신부님이다.
 

 
 

김유철 (스테파노)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경남민언련 이사, 한국작가회의 시인, 창원민예총 대표. 저서 <그대였나요>, <그림자숨소리>,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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