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위의 마을' 최선아 씨에게서 듣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법

신자들에게 공동체란 매우 익숙한 단어다. 교회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모인 공동체'이며 한몸으로 부르심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니 공동체란 그저 같은 공간 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온몸으로 살아 내는 것이어야 한다.

개인의 소유를 내려놓고 함께 일하며 기도하는 가톨릭 공동체 '산위의 마을'에는 30여 명의 사람들이 그런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고 있다. 공동체 성원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공동체로 들어오는 과정이 자기 결단이나 의지가 아닌 '부르심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자리에

ⓒ문양효숙 기자

산위의 마을 공동체에서 '내사'를 맡고 있는 최선아 씨는 남편, 딸과 함께 2011년 2월에 공동체로 들어왔다. ('내사'는 식당을 제외한 나머지 공동체 일 모두를 포함한다. 외부 손님을 관리하고 단기 입촌자 숙소 '더부네'를 청소하는 일도 최선아 씨의 몫이다.)

최선아 씨는 2005년에 부부가 함께 세례를 받은 후 "신앙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고 했다. 부부는 기존 사회의 틀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고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아 보고 싶은 열망도 있었다. 2010년 5월 <매일미사> 책에서 산위의 마을 광고를 봤다. 최선아 씨 가족은 그해 9월에 7박 8일간의 단기 입촌을, 같은 해 12월에 한 달간의 참관 생활을 한 뒤, 2011년 2월에 재산을 정리해서 들어왔다. 마을에 대해 알고 1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자연 속에서 농사를 짓고 싶었는데 혼자 하는 귀농은 자신이 없었다. 공동체는 밭도 있고, 농사도 서로 물어보면서 할 수 있다. 부족함을 보충하며 같이 가는 장점이 있다. 하나뿐인 아이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해주고 싶은데 핵가족화되어 있어서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딸아이가  공동체 생활을 즐거워했다."

그즈음 그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라는 물음도 깊어졌다.

"40대를 넘어 몸이 늙는 신호로 병치레를 하며 인간 몸의 나약함과 삶의 허무를 동시에 느꼈다. 맑은 영혼으로 살다가 건강하게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니어링 부부, 변산공동체 관련 책들이 손에 잡혔다. 그러면서 남은 인생을 그렇게 '다르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공동체에 들어오는 결정보다 한 달간의 참관 생활이 더 어려운 결정이었다. 한 달이나 휴가를 낼 수 없어서 직장을 그만둬야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비롯한 혈육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너무 많이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를 '버릴 것들이 적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는 "가난한 삶 가운데 부르심이 있었다"고 했다. 공동체로 향하는 과정은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공동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산위의 마을 공동체는 2004년 독신과 가정 2세대를 포함해 10명이 입촌하면서 시작했다. 현재 산위의 마을에 상주하는 박기호 신부는 2006년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소속으로서 마을에 들어왔다. 그해 단기 입촌자 숙소인 '더부네'와 친환경 화장실 '해우소'도 준공했다. 단기 입촌(7박 8일)-참관 생활(1~3개월)-지원자 생활(1년)-수련자 생활(3~4년)을 거쳐 종신서원을 해야 공동체의 정회원 가족이 된다. 현재 독신을 포함한 5가구 30여 명이 함께 살고 있으며 입촌 5년이 지나고 있는 한 가정이 종신서원을 준비 중이다. 종신서원을 할 때는 재산을 헌납한다.

▲ 오전 노동 전 기도. 최선아 씨(왼쪽 두번째)와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최선아 씨에게 지원기 1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그는 "공동체는 하나의 커다란 학교"라면서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온몸으로 깨닫는, 그리고 복음을 삶으로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답했다.

"공동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바깥에서는 자기하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있을 수 있지만, 공동생활은 사람들을 다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정확한 성격이어서 처음엔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있는 그대로 봐주고 넘어가는 법을 조금 익힌 듯 하다."

그 마음의 밑바닥에는 새로 익힌 '하느님의 계산법'이 있다고 했다. 그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저녁에 와서 일한 사람의 임금을 왜 똑같이 준다는 것인지, 세상 계산법으로 잘 이해되지 않았던 복음서 말씀의 의미를 이곳에서 알게 됐다.

"하느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아침에 온 사람, 저녁에 온 사람 똑같이 다 줘야 한다. 같이 일하는데 나는 많이 필요하지 않아서 안 가져갈 수가 있고, 어떤 사람은 몸이 아파서 일도 적게 하고 많이 필요하니까 더 가져갈 수도 있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공동체) 밖에서는 확실하게 일한 만큼 가져가지 않는가. 복음이 삶으로 느껴졌다."

그는 세상의 계산법이 '틀렸다'고 말했다. 내가 조금 일하고 많이 가져갈 때가 있고, 다른 사람이 그럴 때도 있는데 항상 다른 사람이 많이 가져가는 것만 보였었다고.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적이고 영적인 면까지 포함하면 정말 평등하다"고 했다.

공동체 성원들이 말하는 '사랑'은 바깥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조금 달랐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 모든 것을 완전히 수용하여 합일에 이르는 것, 혹은 감정의 최대치를 요구하는 농후한 사랑이라면, 산위의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마음에 남기지 않고 자비롭게 지나가 주는 것에 가까웠다. 항상 뼛속까지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타인의 존재 자체만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느슨하지만 보다 큰 테두리 안에 공존하는 그런 상태 말이다.

최선아 씨는 1년의 수련기를 넘기며 그 '사랑'을 몸으로 살아 낼 수 있는지 점검 중이라고 했다.

"아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 수행이 필요하다. 부족한 존재들이라 혼자는 어렵다. 함께 해나가야 한다."

그 수행의 중심에는 매일 드리는 미사와 기도, 영적 독서가 자리잡고 있다. 그는 매일 전례를 따라간다는 것이 몸에 버거울 때도 있지만, 끊임없이 성찰해 나갈 수 있는 틀이 있어서 오히려 좋다고 했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으니 몸이 힘들 때는 얼마든지 쉬기도 하고 게을러지기도 한다. 그럴 때 공동체 식구들은 이해하고 기다려 준다고 했다.

▲ 산위의 마을에서 공동체 식구들이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우리가 혼자 있을 때에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될 때에는 사랑하는 능력이 절대로 부족하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철저히 부정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우리에게 사랑이 불가능해진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암흑과 절망, 고뇌밖에 없다. 사랑은 환상처럼 보이며 고독과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 생활은 우리의 한계와 약점과 무지를 뼈저리게 들추어 낸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 내부에) 괴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것들을 밖으로 끌어 내어 길들이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해방을 향한 성장이다. 공동체는 우리의 능력과 더불어 한계도 받아들일 때 점차 해방의 자리로 굳어 간다." (장 바니에, <공동체와 성장>, 성바오로, 1985, 13~14쪽)

욕망의 주체인 '개인'은 공동체와 어떻게 조화되는가

공동체로 살아갈 때에 한 개인의 욕망은 포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욕망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본질적인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모든 개인이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것만이 자연이며 선이라 말할 수는 없다.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은 개인의 욕망을 버리거나 억제하는 삶인가? 최선아 씨는 공동체에서 살면서 자신이 얼마나 동물적 본성 안에 살고 있는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처절하게 알게 됐다고 했다.

"여기서는 기본적인 본성, 욕망이 많이 느껴진다. 밖에서는 음식도 지천에 깔려 있고 소비도 내가 선택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물리적으로 차단되어 있고 식사 시간과 메뉴도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음식 조절하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고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최선아 씨는 공동체에서의 일상을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욕망이 없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바깥세상에서는 필요해서 갖고 살았지만 여기서는 필요 없는 것들이 많다. 오히려 다른 게 필요하다. '자비심'과 '인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그는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잃는 것이라 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었냐고 물었더니 그는 "내 마음대로 내 욕망대로 사는 것,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을 버리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얻었다"고 답했다. 


▲ 산위의 마을 공동체 저녁 기도 모임에서 다섯 살 다예가 라틴어 찬양을 함께 부른다.

인간의 욕망은 본질적이지만 그 종류와 정도가 언제가 일정한 것은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삶을 통해 최선아 씨는 자신의 욕망을 보고, 때로는 흘려 보내고,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밖에 있으면 불려다니고 끌려다녔다. 그러다보니 복잡해지고. 공동체에 살며 바깥세상과의 교류가 자연스레 끊어지면서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가끔 그 관계들이 그립긴 하지만 그건 욕심이다. 그럴 때 스스로에게 얘기한다. '그렇게 살아 봤는데 허무했잖아. 갈망했잖아. 그래서 찾아왔잖아.' 그리고 잠시 기다리면 확신이 든다. 적어도 내게는 좋은 선택이라고."

"공동체는 각 사람이 내적 자유를 향해 성장하는 자리이다. 공동체는 개인의 의식, 하느님과의 유대, 사랑에 대한 인식, 은총과 선물의 수용 능력 모두가 성장하는 자리이다. 공동체는 결코 개인에 우선할 수 없다. 사실 공동체의 아름다움과 통일성은 각 개인의 밝은 양심과 그 빛, 진리, 사랑, 그리고 타인과의 자발적인 일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장 바니에, <공동체와 성장>, 성바오로, 1985, 48~49쪽)

▲ 산위의 마을 공동체의 식사 기도 시간 ⓒ문양효숙 기자

공동체는 일치를 위해서 한 개인이 억압되는 공간이 아니다. 자신의 참 모습과 다른 이상적인 모습으로 살기를 강요받는 그런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장 바니에가 밝혔 듯 '자기가 될 권리'를 가지고 내적 자유를 향해 성장해 나가는 공간이다. 물른 그 과정이 쉽지는 않다.

최선아 씨는 2011년 12월 경 전체 가족이 모여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쓰고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읽는 '생활 평가'를 받았다. 자신에 대한 평가라, 긴장되고 마음이 아플 만도 한데 다 인정이 되더라고 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다. 인정할 수 없어서 힘들고 괴로울 때도 많았다. 내 힘이라기 보다는 하느님이 주신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정하고 나면 변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생각했던 내 모습이 공동체적 기준에서 보면 매우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는 자신이 아직 세상에서 입었던 남의 옷을 벗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했다. 무엇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지나쳐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공동체에서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처럼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공동체에 들어오는 게 너무 큰 헌신이나 포기를 의미한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별로 포기한 것도 없다. 마을에는 일꾼들이 많이 필요하다. 대안 학교, 생활 유학, 농사 등 재미있고 가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 최선아 씨가 살고 있는 가정사. 1층에는 최선아 씨가, 2층에는 다른 공동체 가족이 산다. ⓒ문양효숙 기자

ⓒ문양효숙 기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저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분도출판사, 1985년)에서 '대조사회' 혹은 '대척사회'로서의 교회를 말한다. 이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 속의 공동체가 돈과 권력에 미친 세상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새로운 사회였음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거룩한' 혹은 '구분된'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내적 자세의 변화를 넘어서 세상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는 존재임을 말한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그들만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고립된 섬이라는 시선도 있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역동적 힘을 간과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시선은 공동체가 사는 방식이 세상의 것과 너무 다른 이상적인 수준이라는 괴리감을 담고 있다.

그러나 만약 복음서의 말씀이 '이해할 수 없는 계산법'이라고 느껴진다면 한번쯤 재고해봐야 할 터이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세상의 계산법이 틀린 것은 아닌가' 하고. 왜냐하면 성서는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이상적 가치를 나열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거나 부담스럽다는 것은 우리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적 삶의 방식에서 너무 멀리 와 있기 때문은 아닌가 되물어야 할 때이다.

공동체는 세상과 동떨어진 완벽한 이상 사회가 아니다. 먹고 일하고 부대끼는 매우 현실적인 사회적 실재다. 이들이 온몸으로 부대기며 복음을 살아 내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면, 그들은 세상의 계산법에 매몰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성찰하게 하는 '산위의 등불'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로 장 바니에는 공동체가 '그저 좋아서 함께 살아가는 집단'이 아니라며 이렇게 강조했다.

"공동체란 단순히 함께 살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흐름이요, 심장이며, 영혼이요, 정신이다. 그것은 서로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들이요, 동일한 희망을 향해 몰려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런 것이 참된 공동체의 특징인 기쁨과 환대의 풍토를 조성해주는 것이다." (장 바니에, <공동체와 성장>, 성바오로, 1985,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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