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욱종의 우리네 교회는] 우리나라의 장묘제도 역사를 통하여

까타콤바에 이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죽음과 장례에 관한 풍속은 그 시대의 사회정신을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장묘제도는 특히 느리게, 천천히 이루어진다. 인간의 삶이란, 생명을 지니되 유한한 생물체인 조건 안에 있으므로 삶이 끝장나는 사건인 죽음은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추리로 이어져서 인간정신의 기본틀을 지배할 뿐 아니라 시대정신을 총체적인 반영하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느리게, 천천히 변화해 간다.

 그러한 예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고려시대의 말기에 유입된 유학에 의해 쇠퇴해가는 고려의 국운처럼 고려의 호국불교의 운명도 함께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기묘하게도 고려의 충신으로 대표적인 기개를 자랑하던 정몽주에 의해 유교식의 장례의식과 묘지에서의 상제가 시도되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정몽주는 부모의 상을 당하면서 당시의 100일상을 따르지 않고 3년상을 치루었으며 동시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극진히 예를 다했다. 그는 더 나아가 가묘의 설립과 제사를 주장하여 가묘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러나 정몽주의 이러한 시도들은, 시대적인 사회상의 반영이란 존경받는 어느 위대한 인물의 모범으로 금방 만들어지거나 또는 반대로 문을 닫는 경우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가 되고 말았다.

 즉, 고려의 호국불교 대신에 유교가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는 여전히 불교식의 화장이 성행하였으며, 이의 억제를 위하여 세조 때의 경국대전의 반포를 넘어 선조 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억제를 강조하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정몽주의 유교의 정신에 입각한 모범에도 불구하고 유학자들 속에서도 삼년상과 초빈의 정착은 선조 때에 이르러 겨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김종직과 조광조 등의 새로운 사림파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선조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유림의 일반적인 제도로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시대에도 바꿀 수 없었던 개인묘와 문중묘 그리고 3공화국 시대의 폭력에 의한 가정의례준칙도 묵살된 상황 등이 그러한 상장례 제도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예는 ‘법(제도)’과 ‘관습’ 충돌에서의 긴장관계가 죽음과 장례의식에서 더욱 두드려짐을 확인할 수 있다(유명무실한 ‘장사등에관한법령’).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은 법적인 제도로써의 간섭이 효과를 발휘하여 두루 퍼지는 과정에는 항상 상류층의 모범적인 행위들이 있음으로 하여 민간이 그를 본받아 퍼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고려 말의 정몽주의 묘 옆의 여막 제작과 가묘, 제사의 행위와 조선 선조 때의 선비들이 상중에는 宴樂에 참여하지 않고, 시묘막을 짓고 돌보는 행위 등을 보면서 처음에는 괴이하게 여기다가 풍조가 반전되어 오히려 그러하지 않는 자들을 비루하게 여긴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지금의 장사제도에서 제도의 틀과 상장례의 의식이 조선시대의 전통과 과히 거리가 멀지 않은 형태로 그대로 남아있는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법적인 제도로써의 간섭이 미치는 영향력의 한계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다른 한편으로 지도층과 상류층의 모범적인 행위들에 의해서 관습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현재 장묘제도에서의 뚜렷한 변화는 화장의 급격한 성장이라는 점이다. 장례의식은 오히려 전통을 고집하여 매장의 형태를 위한 염습과 수의의 성격이므로, 화장시에는 다른 변화가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에는 장례사업자들의 독점적인 수익과 연결되어 있으나 유족들의 고인에 대한 죄의식과 그 보상이라는 측면에서의 성의라는 성격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더 나아가 부의금으로 장례비용을 충당해 오는 상부상조의 관습 역시 상장례의 구조적인 성격변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상의 반영은 향후 상장례의 변화를 주도해 나가려 할 때 충분히 감안하고 숙지해야 할 엄연한 현실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반복해서 강조한다면 정몽주의 모범이 실행되기까지 걸린 장구한 세월과, 일제시대에도 개인묘와 문중묘를 없애지 못한 점, 그리고 3공화국의 폭력적 요구인 가정의례준칙의 실패 등은 상장례란 시대적 사회정신의 총체적인 반영이므로 그에 합당한 접근이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자유주의 사상의 확산에 따라 상장례에서도 여러 가지 실험과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화장 후의 처리에서도 납골당 자체가 예전의 방식만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로 시도되고 있으며, 산골의 다양한 종류의 등장, 수목장의 시도, 우주장 등등 상상의 세계를 현실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들의 무리한 시도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인식 자체를 무시하는 무례한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죽음이란 엄숙하게 이루어져 온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마감하는 사건이다. 그 의미는 결코 자본주의의 소비와 유통의 문제로 추락할 수 없으며, 경영의 한 분야로 전락할 수는 없다.

 죽음이 중요한 이유는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듯이 인간 삶에 대한 존중의 자세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 죽음에 관한 기본자세일 것이다. 즉, 현재 삶의 조건을 형성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물질중심의 지향에서 인간정신중심의 지향으로 옮아가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인간정신 중심의 제자리를 차지하도록 이끌어나가야 한다.

  /조욱종 (요한) 천주교 부산교구 부곡동 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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