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욱종의 우리네 교회는] 까타콤바에서 배우는 묘지 나눔

▲ 까타콤바의 입구를 멀리서 바라본 전경
 까타콤바, 그것은 나눔과 사랑이 실천으로 드러난 결실이며, 그것은 공동묘지가 아닌 공동체 묘지의 전형이기도 하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삼성비리를 고발하여 삼성의 비리를 파헤칠 수 있도록 이끈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동시에 사제단의 일원으로서 사제단의 시각교정에 대한 기대라는 점에서도 반갑게 다가왔다.

 사제단의 시각과 시야가 본격적으로 경제정의를 비롯한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로 관심을 확대하게 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세상의 다양한 분야의 빛과 그림자를 조명하여 어두운 곳을 찾아가 세상이 눈뜨게 하는 빛으로서의 사제단의 지향이 더 다양하게 확대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다루는 태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죽음을 둘러싼 불의한 문제점들,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시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까타콤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묘지와 장례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보고자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까타콤바이다.

 로마의 건축 양식의 특이한 점은 폼페이의 발굴 이래로 더욱 확연하게 비교할 수 있다. 폼페이는 화산재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2000년 전 도시의 형태를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폼페이가 특별한 이유로 인한 예외적인 한 두 개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단층건물이 주류를 이룬 데 비해 로마의 건물들은 대체로 4-5 층짜리 건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 건축물들의 특징은 다름 아닌 토지의 부족현상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이다. 안전한 지역 안에서의 삶의 터전이 생명보존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던 그 시대에서 볼 때 로마는 가장 안전한 도시였고, 로마의 독특한 정복 정책에 의해 로마시민의 숫자는 점점 더 불어났다. 인구밀도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택난이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좁은 땅에서의 심각한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고층 아파트를 짓는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면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묘지 문제 역시 심각하였다. 로마는 일찍부터 위생적인 문제를 이유로 십이동판법에 의해 도시 내부에는 매장을 할 수 없게 하여 도시에서 외곽으로 뻗어나가는 도로 주변을 묘지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아피아 가도나 아를의 알리스깡 등의 도로변이 묘지였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을 분리하는 이 원칙은 굳이 로마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대부분 동일하게 나타난다.

 도로변이라는 제한된 장소는 한정된 공간이라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기 힘든 형편이었다. 더구나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운송시설에 종사하는 사람들, 건설 현장의 잡부들, 원형경기장 등에서 종사하는 연예인들, 하급의 군인들, 노예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노동에 지쳤던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묘지난이었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묻힐 땅을 얻지 못하는 설움을 겪어야 했지만 그리스도교인들은 의외의 행운을 얻게 되었다.

▲ 까타콤바에 들어가는 입구 :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다

 당시 로마 교회의 그리스도교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부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쓴 믿음의 자세로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으며, 더 나아가 자신이 소유한 땅에다 지하 공동묘지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공동묘지들, 즉 카타꼼바의 이름들은 기증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불리었는데 사비나, 발비나, 체칠리아, 아나스타시아, 크리스고노, 에우세비오, 푸덴스, 프리실라, 도미틸라, 막시무스, 트라소, 코모딜라, 아그네스, 오타빌라 등등의 이름을 가진 지하묘지들이었다.

 이들은 동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렇듯 카타콤바는 한마디로 나눔을 통한 사랑의 실천이며 단순한 공동묘지가 아닌 공동체 묘지로 승화되는 전형이 되고 있다. 성당 건립을 위한 재정 마련의 방편이 아니라 오히려 묘지를 살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묘지를 제공해 주었던 나눔의 실천을 보여주는 본보기인 것이다.

 이러한 정신들이야말로 박해시절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동체 정신을 고양시켜주는 바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집단으로 모여 있기 때문에 공동묘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이 죽어서도 공동체를 이루는 좋은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분리 원칙 아래에서도 얼마든지 공동체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참정신이다.

 까타콤바의 이러한 공동체 정신이 훼손된 이유는 무엇이며, 지금과 같은 묘지난의 어려움을 겪고있는 우리나라에서의 공동체 정신 구현의 방법은 없을까? 이런 문제들을 계속 짚어나가고자 한다.

  /조욱종 (요한) 천주교 부산교구 부곡동 성당 주임신부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