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욱종의 우리네 교회는] 성당내의 납골당, 글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교구 주교좌 성당은 2002년에 새로 완공했다.

 로스앤젤레스의 새로운 명소로 각광받고 있는데, 초현대식 건물은 내부의 구조와 장식도 마치 시대를 앞서가는 미술작품 전시회장 같아 보인다. 예를 들어 성인상을 조각으로 만들지 않고 대형 걸개그림으로 만들었는데, 100인을 선정하여 대형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세계 100대 성인의 선정 작업에 한국인 성인도 2분이나 있어 한국 관광객들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성 정하상 바오로이다. 고증이 엉망이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갓을 쓰고 있으면서 머리는 뒤로 풀어헤친게 꼭 록 가수 같아 보이고, 정하상 바오로는 베트남인인지, 인도인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아 마치 200년 전에 서역에서 온 비단장수 같아 보인다.

 과연 현대미술적인 감각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씁씁하다. 그래도 세계 100대 성인 중에 우리 성인이 끼어 있다는 자부심으로 모든 걸 상쇄하고 넘어가려는 분위기이다.

 이 주교좌 성당이 로스앤젤레스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이유에는 지하묘지의 탓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유명인들이 많이 묻혀있어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묘소 참배를 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에 죽은 그레고리 팩과 히치콕 등, 영화인들이 많은 탓은 헐리웃을 포함한 지역이기 때문이리라. 나이든 아줌마들이 그레고리 팩의 납골벽 앞에서 손으로 쓰다듬고 입맞추는 모양새가 흡사 젊었을 적에는 오빠 부대였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러니 관광객들이 수없이 드나드는 이런 지하납골묘지에 다들 묻히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자칫하면 자식마저 죽은 자기를 잘 찾아주지 않을 시대를 살면서 이렇게 많은 관광객들이 붐비면서 기도해주고, 기억해주는 묘지에 묻힌다면 얼마나 큰 행복인가 말이다. 더구나 유명인이 옆에 있어준다면 혹시라도 실수하여 자신의 묘에 입맞추는 여인이 없으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가격도 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부담스럽지도 않다. 그래서 계산해 보면 10.000달러에서 시작하는 분양가를 계산할 때 1,000기를 보관할 수 있다면 최소한 천만 달러는 확보하게 된다. 그래서 지하묘지를 한바퀴 둘러보면 분양가나 보관 기수가 금방 눈에 들어오는데, 그보다 훨씬 상회함을 금방 알 수 있으니 어머어마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성당 건축비를 다 이 지하묘지 분양에서 충당했다고 해도 믿을 판이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초현대식의 성당건물, 내부의 장식들도 현대식 미술관처럼 꾸민 가장 최근에 지은 이 성당에다 왜 하필 지하묘지를 만들었는가?

 대답에 응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건축비 마련에 그 이유를 두고 있었다. 물론 짐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에서 성당내에 납골묘지 만드려고 하는 이유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믿어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자, 이제 우리나라의 성당내 납골묘지 조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크게 요약해서 두 가지 문제점을 들 수 있다. 성당내에 납골묘지를 조성하려는 근거가 무엇인가? 건물내 납골묘지 조성의 경제적 수익은 가능한가?

 유럽의 오랜 된 성당들에 납골묘지가 생기게 된 이유를 <장례 이야기1>에서 다루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촉구와 성인유해공경사상의 합작품인 성당내 묘지 조성 전통은 유럽을 병들게 하고 성당을 과거의 음산한 추억의 시간에 머물게 하여 현재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부정적인 평가로 가득한 성당내 묘지 조성, 그것을 현대식으로 발전시켜 납골묘지를 만들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유럽을 관광하면서 곳곳마다의 오래된 성당들에 안치된 시신들을 보면서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적절한 전통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참으로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렇지 않다면 왜 주위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성당내에 납골묘지를 만들려고 강행하는가? 정말 주위의 우려처럼 성당 건축비 마련을 위한 목적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참으로 오산이다.

 콘크리트 건축물의 수명이 50년도 채 못된다는데, 교회가 영구히 보존해주기 힘들뿐더러, 결국 성당을 재건축할 때 납골묘지도 새로 지어주어야 하므로 장기적인 전망에서 보면 경제적인 이윤이 생기지 않는 손해보는 일이다.

 실지로 납골묘지에 관한한 한국의 선두주자였던 불교계에서도 이젠 골치아픈 종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래서 더 손쉬운 장사인 수목장을 넘보고 있다(수목장은 다음 호에서 다루기로 한다).

 납골묘 전체 사업의 측면에서도 이젠 공급과잉이 되어 은행 융자로 지은 곳에서는 원금상환이 어려운 부채의 원인이 되고 있다.

 신학적 근거도 약하고, 경제적 실익도 없는 사업을, 더구나 주변의 반대에 부딪혀 주민정서를 깨트려서 선교에도 방해가 되는 일을 왜 교회가 앞장서서 하려고 하는가? 그 이유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교회 묘지의 아름다운 시작과 전통이었던 까타콤바를 기억하게 하고 싶다. 나눔과 평등의 정신의 구현이었던 까타콤바야 말로 현대교회가 되새기고 드높혀야 할 정신이다.

  /조욱종 (요한) 천주교 부산교구 부곡동 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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