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동쪽에서는 약탈이 시작되었다 합니다. 경각심을 일깨우는 소식이 매 시간마다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화단원들은 사방에서 북경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유럽인을 말살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공격도 곧 시작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30년 전 천진에서의 학살과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제 의무는 교회와 신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사오십의 해군 병사를 북당(北堂)으로 보내주십시오.” - 파비에 주교의 편지, ‘Siège de la mission catholique du Pé-tang’ 중에서.

알퐁스 파비에 주교. 그리고 그가 집필한 책 ‘Peking: Histoire et Description’<br>(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br>
알퐁스 파비에 주교. 그리고 그가 집필한 책 ‘Peking: Histoire et Description’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북당 포위전의 시작

1900년 6월 14일, 북당이 포위되었다. 조짐은 전부터 뚜렷했다. 불안한 전갈이 도처에서 날아들었다. 소식은 갈수록 명확했고,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위험이 코앞이었다. 파비에(Alphonse Favier, 樊國梁, 1837-1905) 주교는 급히 서신을 보냈다. 스테판 피숑(Stéphen Pichon, 1857-1933),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가 수신자였다. 주교의 어조는 결연했다. “북당을 지켜야 합니다. 프랑스 병사를 보내주십시오.” 5월 19일에 쓴 편지였다.

북당의 담장 안에는 신자 3400여 명이 피신해 있었다. 8할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의화단 무리는 선교사뿐 아니라 중국인 신자에게도 위해를 가했다. 교회에 모인 이들의 생명을 지켜야 했다. 주교는 5월 중순부터 상황에 대비했다. 상당한 양의 식량과 무기, 탄약이 모였다. 프랑스 해군 병사 40여 명도 때마침 당도했다. 프랑스 공사의 응답이었다. 결전의 날이 임박해 있었다. 봄빛도 자취를 감추었다. 때 이른 더위였다.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1866년 겨울, 잠지구에 완공된 북당. 물리 주교는 옛 북당 터에 프랑스 건축가가 설계한 프랑스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축성 미사는 이듬해인 1867년 1월 1일에 성대히 거행되었다. 물리는 주교좌성당을 남당에서 북당으로 옮겼다. 1871년의 사진이다.&nbsp;©시스쿠 천주당 역사관 전시, 오현석
1866년 겨울, 잠지구에 완공된 북당. 물리 주교는 옛 북당 터에 프랑스 건축가가 설계한 프랑스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축성 미사는 이듬해인 1867년 1월 1일에 성대히 거행되었다. 물리는 주교좌성당을 남당에서 북당으로 옮겼다. 1871년의 사진이다. ©시스쿠 천주당 역사관 전시, 오현석

그 여름의 전투

의화단 무리는 이내 북당을 에워쌌다. 1만 무리였다. 소총과 대포를 쏘아대며 진입을 시도했다. 담벼락 밑으로 땅굴을 파기도 했다. 북당 안, 수비군의 방어도 만만치 않았다. 적은 숫자였지만 단결된 이들이었다. 그해 여름, 북당 장벽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그렇게 싸웠다. 포위전이 끝난 건 8월 16일이었다. 유럽과 일본의 연합군이 의화단 무리를 내쫓았다. 62일간 지속된 대치가 마침내 끝난 것이다.

북당이 입은 피해는 컸다. 북당 내의 인원 400여 명이 사망했다. 시신을 찾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재산 피해도 적지 않았다. 여러 부속 건물이 부서졌다. 신자들을 지켜낸 담장도 더는 버틸 힘이 없어 보였다. 다행히 성당 자체는 경미한 손상에 그쳤다. 그 여름, 동당(東堂)과 남당(南堂)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니 북당의 건재는 행운이었다.

당시에 찍은 사진 하나는 승리의 순간을 담고 있다. 북당 앞 계단에 기뻐하는 주교가 서 있다. 그 주위로 한 무리의 군인이 주교를 에워쌌다. 프랑스 장교와 병사들이다. 그들은 ‘테 데움’(Te Deum)을 부르고 있다. 승리의 찬가였다. 이교도와 싸워 이긴 승리를, 그들은 그렇게 자축했다. 단지 그 여름 전투를 위한 찬가가 아니었다. 그들이 지켜낸 건 200여 년의 역사였다. 프랑스의 중국 선교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성당. 북당의 내력은 그토록 깊었다. 프랑스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었다.

잠지구 옛 북당의 위치. 잠지구는 지금의 쫑난하이(中南海)다. 시진핑 주석을 비롯해 중국 정부 최고위층이 거주하는 곳이다.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며 주변에서 사진도 찍을 수 없다. 그림 중앙을 보면 ‘북천주당’(北天主堂)이 있다. 북당이다. 그 북편에 붙은 ‘인자당’(仁慈堂)은 수녀원이다. 동쪽에 있는 ‘중해’(中海) 건너편이 바로 자금성이다. 그리고 ‘인자당’의 북쪽 건너편(도로 맞은편)에는 현재 중국국가도서관 고적관(古籍館)이 있다. 고적관 동쪽 호수가 유명한 ‘북해공원’(北海公園)이다.&nbsp;©시스쿠 천주당 역사관 전시, 오현석
잠지구 옛 북당의 위치. 잠지구는 지금의 쫑난하이(中南海)다. 시진핑 주석을 비롯해 중국 정부 최고위층이 거주하는 곳이다.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며 주변에서 사진도 찍을 수 없다. 그림 중앙을 보면 ‘북천주당’(北天主堂)이 있다. 북당이다. 그 북편에 붙은 ‘인자당’(仁慈堂)은 수녀원이다. 동쪽에 있는 ‘중해’(中海) 건너편이 바로 자금성이다. 그리고 ‘인자당’의 북쪽 건너편(도로 맞은편)에는 현재 중국국가도서관 고적관(古籍館)이 있다. 고적관 동쪽 호수가 유명한 ‘북해공원’(北海公園)이다. ©시스쿠 천주당 역사관 전시, 오현석

19세기, 폐허의 자리에서

사실, 북당의 역사는 순탄치 않았다. 완전히 허물어진 적도 있었다. 1860년 가을, 물리(Joseph-Martial Mouly, 孟振生, 1807-68) 주교가 돌아왔을 때, 북당은 폐허였다. 주춧돌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허름한 주택 몇 채가 있었고, 가끔씩 서양식 철제 난간 조각이 보이기도 했다. 그뿐이었다. 북당은 거기 없었다. 잠지구(蠶池口)는 강희제가 하사한 땅이었다. 한때, 그 땅 위에는 루이 14세의 충성스런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 숱한 이야깃거리도 거짓말처럼 사라진 듯했다.

북경조약에 따라 청 조정은 천주교 재산을 반환했다. 11월 28일, 물리는 북당 반환 증서를 받았다. 성당은 사라졌으나 그 땅은 틀림없었다. 물리는 재빨리 그 땅의 건물도 취했다. 주택 하나를 선교사 거처로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미사 공간으로 꾸몄다. 임시 성당(chapelle)이었다. 이듬해 초여름, 물리는 거기서 첫 미사를 올렸다. 성체 축일(Corpus Christi) 미사였다.

(왼쪽 위아래) 1880년대에 자금성 쪽에서 잠지구 북당을 찍은 사진이다. 다리 저 편에 북당의 종탑이 보인다. 서태후에게 이 성당은 눈엣가시였다. (중앙) 1888년 시스쿠(西什庫)로 이전하여 새롭게 건축한 북당. 위에 것은 동판화고, 아래 것은 사진이다. 지붕과 탑의 높이가 잠지구 옛 북당보다 낮아졌다. (오른쪽) 시스쿠 북당 내부 모습.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시스쿠 천주당 역사관 전시, 오현석
(왼쪽 위아래) 1880년대에 자금성 쪽에서 잠지구 북당을 찍은 사진이다. 다리 저 편에 북당의 종탑이 보인다. 서태후에게 이 성당은 눈엣가시였다. (중앙) 1888년 시스쿠(西什庫)로 이전하여 새롭게 건축한 북당. 위에 것은 동판화고, 아래 것은 사진이다. 지붕과 탑의 높이가 잠지구 옛 북당보다 낮아졌다. (오른쪽) 시스쿠 북당 내부 모습.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시스쿠 천주당 역사관 전시, 오현석

잠지구에 북당을 재건하다

물리가 줄곧 머문 곳은 남당이었다. 주교좌성당(cathédrale)이었다. 예부터 그랬다. 북당과 달리 남당은 남아 있었다. 퇴락하고 부서졌으나 형체는 있었다. 물리는 그곳에서 시작했다. 당연했다. 남당이 주교가 자리해야 할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공간을 보고 있었다. 도시 중심으로 한걸음 더 나아간 곳. 황제의 처소와 맞닿아 있는 곳. 잠지구, 옛 북당 터였다. 물리는 거기에 크고 멋진 성당을 지으려 했다. 프랑스 건축가가 세울 프랑스의 교회였다. 총리아문의 관리들도 새로운 성당을 승인했다.

1864년 말, 물리는 건축 설계를 의뢰했다. 프랑스에 있는 건축가들이었다. 또한 주교의 보좌였던 마르티(Paul-Joseph Marty, 1829-73)에게 제반 실무를 맡겼다. 이듬해 5월 1일에 정초식이 있었다. 정계 요인, 각국 사절단 대표 등 고위 인사 다수가 참석했다. 물리 주교의 기획이었다. 공사는 1년 반이 걸렸다. 모든 게 순조로웠지만 내내 꼼꼼히 살펴야 했다. 유럽식 건축이 일꾼들에게 낯설었던 탓이다. 축성 미사는 정초식 때처럼 성대했다. 1867년 1월 1일이었다.

고딕식 성당은 격조가 있었다. 14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스타일이다. 규모도 컸다. 건물의 앞뒤 길이가 49미터, 가로 회랑(transept) 너비가 30미터였다. 주교좌성당으로 손색이 없었다. 문제는 종탑이었다. 물리는 애초에 45미터 높이를 원했다. 오늘날 아파트 16층이다. 당시 북경의 경관을 생각하면 실로 거대한 높이다. 게다가 잠지구는 자금성 코앞이었다. 청(淸)의 관리들이 펄쩍 뛸 것이었다. 씨알도 안 먹힐 제안이었다. 하여, 탑 높이는 28미터로 하되 종탑 두 개를 나란히 세웠다. 청의 관리들도 그 안에 동의했으나 종탑 높이는 여전히 불안했다.

시스쿠(西什庫) 북당과 부속 건물 배치도. 오늘날 북당이 들어선 바로 그 자리다. 20세기 초로 의화단 운동 이후, 1920-30년대 즈음이 모습인 듯하다. 배치도를 보면 거대한 직사각형 부지에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성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인쇄소, 신학교, 수도원(사제관)이 있고, 서쪽에는 주교 공관 및 행정동이 있다. 성당 바로 뒤편이 도서관이다. 그 유명한 북당도서관이다. 도서관 동쪽으로 소신학교가 있었다. 가장 북편이 수녀원이다. 고아원, 여학교 등이 부설되어 있었다.&nbsp;©시스쿠 천주당 역사관 전시, 오현석
시스쿠(西什庫) 북당과 부속 건물 배치도. 오늘날 북당이 들어선 바로 그 자리다. 20세기 초로 의화단 운동 이후, 1920-30년대 즈음이 모습인 듯하다. 배치도를 보면 거대한 직사각형 부지에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성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인쇄소, 신학교, 수도원(사제관)이 있고, 서쪽에는 주교 공관 및 행정동이 있다. 성당 바로 뒤편이 도서관이다. 그 유명한 북당도서관이다. 도서관 동쪽으로 소신학교가 있었다. 가장 북편이 수녀원이다. 고아원, 여학교 등이 부설되어 있었다. ©시스쿠 천주당 역사관 전시, 오현석

눈엣가시, 북당

북당의 존재를 누구보다 싫어한 이가 있다. 서태후(西太后, 1863-1908)였다. 1862년, 어린 아들 동치제(同治帝)가 등극하자 청의 실권을 틀어쥔 이다. 이런저런 상황에 떠밀려 북당 건축을 허가했으나 종탑의 높이만은 인정할 수 없었다. 서태후와 보수파 세력은 종탑을 계속해서 문제 삼았다. 자금성 안에서 종탑이 보일 수 있었다. 반대로, 종탑에서도 자금성 너머가 보일 수 있었다. 황금색 지붕 아래가 보이진 않았겠지만 아무튼 아니 될 말이었다.

제국의 황성에서, 황제의 처소 담장을 넘는 높이는 용납할 수 없었다. 보안상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제국의 자존심이 걸린 사안이었다. 황제의 도시 한복판에 높다란 외세 종교의 첨탑이라니! 그들은 줄곧 종탑 철거를 요구했다. 안 되면 높이라도 최대한 낮추려 했다. 1872년 이후엔 요구가 한층 더 거세졌다. 그들은 이제 북당 자체를 철거하려 했다. 서태후는 황제가 성년이 된 이후를 보고 있었다. 황성(皇城) 안 북서쪽 언저리에 저택을 두고 황제의 일을 계속 감독하려 했다. 그놈의 종탑이 또 문제였다. 저택이 들어설 땅이 훤히 내려다보일 것 같았다.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왼쪽) 시스쿠 북당이 들어선 부지의 범위, (맨 오른쪽) 시스쿠 북당의 여러 모습, (중앙 아래) 북당 방어전에 승리한 후, 아직 보수 공사를 시작하지 않은 시스쿠 북당의 모습. ©시스쿠 천주당 역사관 전시, 오현석
(왼쪽) 시스쿠 북당이 들어선 부지의 범위, (맨 오른쪽) 시스쿠 북당의 여러 모습, (중앙 아래) 북당 방어전에 승리한 후, 아직 보수 공사를 시작하지 않은 시스쿠 북당의 모습. ©시스쿠 천주당 역사관 전시, 오현석

북당 이전, 그리고 파비에

그 시기, 북경 주교는 드라플라스(Louis-Gabriel Delaplace, 田嘉璧, 1820-84)였다. 그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북당이 들어선 잠지구는 확장의 여지가 없는 공간이었다. 신자가 나날이 늘었으니 각종 시설도 늘려나가야 했다. 교회 역시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북당 위치는 그 모든 불리함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자리가 사람을 보여 준다 했던가. 건축도 그렇다. 북당이 들어선 자리는 천주교의 위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조국 프랑스의 위상이기도 했다.

주교는 신중했다. 교회의 확장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새로운 공간을 찾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 있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북당을 옮길 수 있다. 잠지구에 준하는 적당한 토지와 상당한 금액의 특별 재정 지원이 있어야 한다. 주교가 북당의 확장 가능성만을 본 건 아니었다. 외교적 고려도 함께 있었으리라. 아무튼 그렇게 협의가 시작되었다. 1884년 5월, 드라플라스가 세상을 뜨자 타그리아뷰(François-Ferdinand Tagliabue, 戴濟世, 1822-90)가 주교직을 이었다. 신임 주교는 파비에 신부에게 협상을 맡겼다.

파비에는 북경에서 가장 경험 많은 협상가였다. 그의 협상 경력은 1870년부터였다. 그해에 천진에서 일이 터졌다. 이른바 ‘천진교안’(天津敎案)이다. 천주교 시설에 불만이었던 군중에게 프랑스 영사가 발포했다.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천주교회뿐 아니라 개신 교회도 불에 탔다. 서양인 20여 명과 중국인 40여 명이 살해되었다. 수녀 10여 명을 겁탈했고 신체마저 절단했다. 처참한 사건이었다.

그때 파비에는 선화부(宣化府)를 맡고 있었다. 북경 서북쪽 바깥의 선교구였다. 하지만 교회 내 사정으로 파비에가 나서게 되었다. 천진 사건의 조사와 처리를 위한 교회 측 대표였다. 이후 그는 여러 협상을 도맡았고, 그때마다 교회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좋은 의미로는 ‘영리했고’, 나쁜 의미로는 ‘잔꾀가 많았다’.

잠지구 천주당 이전에 관한 일을 기록한 외교문서, ‘천이잠지구교당함교’(遷移蠶池口敎堂函稿). 제1권으로 사진은 ‘이문충공집’(李文忠公集)에 실린 것이다. 이문충은 이홍장의 호다. 민국10년 상무인서관 석인본(民國十年商務印書館石印本). (이미지 출처 = 孔夫子旧书网)
잠지구 천주당 이전에 관한 일을 기록한 외교문서, ‘천이잠지구교당함교’(遷移蠶池口敎堂函稿). 제1권으로 사진은 ‘이문충공집’(李文忠公集)에 실린 것이다. 이문충은 이홍장의 호다. 민국10년 상무인서관 석인본(民國十年商務印書館石印本). (이미지 출처 = 孔夫子旧书网)

이홍장과 협상하다

북당 이전 협상에서도 그는 빛을 발했다. 우선 잠지구를 대체할 장소를 물색했다. 조건은 명확했다. 황성 안의 충분히 너른 땅이어야 했다. 또한 철거될 성당과 부속 건물 일체를 보상 받아야 했다. 이전 비용까지도 청이 부담해야 했다. 상대측 협상 대표는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이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청말의 주요 외교 문제를 거의 혼자서 떠맡았던 인물이다. 한때 동아시아 최강인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수장이기도 했다. 서태후가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백성들의 신망도 컸다. 당시 그는 직예총독(直隸總督)이었다.

협상은 쉽지 않았다. 단순히 성당 하나를 옮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아래엔 여러 외교적인 사안이 얽혀 있었다. 서로 속내를 알 수 없으니 떠보는 말만 겉돌았다. 단도직입의 국면이 필요했다. 이때 거간꾼 노릇을 한 이가 있다. 존 던(John George Dunn)과 데트링(Gustav von Detring, 德璀琳, 1842-1913)이다. 천진 해관의 외국인 관원이었다. 이들이 양측을 오가며 물밑에서 조율했다. 파리와 로마로 가서 청의 입장을 설명하기도 했다.

사실, 이면에는 더 복잡한 셈법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선교사들의 후견자임을 자처했다. 중국 천주교의 모든 외교적 사안을 관장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났다. 청 조정은 교황청과 직접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다. 교황청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물밑에서 은밀한 말들이 오갔다. 프랑스 정부가 알면 곤란했다. 그 협상의 이면이었다.

(사진 보기 클릭) 이홍장과 구스타브 데트링의 사진. 가운데 앉아 있는 이가 이홍장. 그의 뒤에 선 두 사람 중 왼쪽이 데트링이다. 출처 = AKG-IMAGES)

오늘날 시스쿠 천주당 전면부 모습. 지난 12월 풍경이다. ©오현석
오늘날 시스쿠 천주당 전면부 모습. 지난 12월 풍경이다. ©오현석

시스쿠, 북당의 새 자리

파비에가 낙점한 장소는 서십고(西什庫)였다. 중국어 표기로는 ‘시스쿠’다. 청 조정의 창고가 있던 자리다. 잠지구에서 북서쪽으로 650미터 떨어져 있었다. 옮겨갈 터로 그만한 데가 없었다. 황성 안인데다가 면적도 상당했다. 7만 6890제곱미터, 평수로는 2만 3260평이었다. 잠지구 터에 비하면 ‘광활한 대지’였다. 자금성에서 좀 더 멀어지나 어차피 중심이긴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땅, 제국의 스케일에서 650미터는 한 줌도 안 되는 거리였다.

합의가 성사되었다. 타그리아뷰 주교도 서태후도 만족했다. 이전 기한은 1년. 광서(光緖) 13년(1887),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까지였다. 이전은 번갯불에 콩 볶듯 했다. 잠지구 건축 때와는 달리, 파비에에겐 프랑스 건축가를 섭외할 시간이 없었다. 모든 걸 직접 챙겨야 했다. 그는 설계 총책임은 물론 현장 감독까지 맡았다. 그의 이력 때문에 가능했다. 사제가 되기 전, 그는 건축가 훈련을 받았다. 새로운 성당이 1년 후에 섰다. 옛 성당의 스타일과 구조를 닮았으나 더 크고 화려해졌다.

종탑 높이는 어땠을까? 협약서에서 이홍장은 높이 제한을 두었다. 그에 따라 성당의 내부 기둥은 16미터로 맞추었고, 종탑도 옛 성당보다 5미터 이상 낮아졌다. 하지만 고딕식 건축 특유의 멋스러움은 그대로였다. 전면부를 장식한 장미 모양 창문도 인상적이었다. 성당이 세워지자 부속 건물도 속속 들어섰다. 터의 남쪽에는 도서관, 인쇄소, 사제관 등이 섰고, 북쪽에는 수녀회가 세워졌다. 고아원과 여학교도 부설되었다. 시스쿠의 널찍한 직사각형 부지는 점점 더 조밀해져 갔다. 제국의 중심, 황성 안에 세운 천주교 타운이었다.

시스쿠 천주당은 최근에 성당 앞에 역사관을 열었다. 북당을 개방하는 시간에 맞춰 가면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다. (주일 미사 시간 외에도 평일에도 개방한다. 평일 개방 시간은 오전 6-11시 반, 그리고 오후 2-5시까지다.) 사진은 그곳에 전시된 시스쿠 북당과 부속 건물의 모형. ©오현석
시스쿠 천주당은 최근에 성당 앞에 역사관을 열었다. 북당을 개방하는 시간에 맞춰 가면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다. (주일 미사 시간 외에도 평일에도 개방한다. 평일 개방 시간은 오전 6-11시 반, 그리고 오후 2-5시까지다.) 사진은 그곳에 전시된 시스쿠 북당과 부속 건물의 모형. ©오현석

1899년 파비에 법령

1899년, 파비에는 직예북부대목구 주교가 되었다. 자신이 세운 성당의 최고 어른이 된 것이다. 그는 ‘애국자’였다. 프랑스 정부의 편에서 교무를 처리했다. 청 조정이 교황청과 가까워지는 걸 그는 지속적으로 방해했다. 혹자는 그의 앙갚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교황대사로 낙점되지 못한 서운함 말이다. 북당 이전 협상 때, 이홍장은 그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초대 교황대사로 그를 추천하겠다는 약조였다. 청이 교황청과 수교하게 되면 말이다. 하지만 교황대사는 일찌감치 내정되어 있었다. 그가 아닌 다른 이였다.

주교에 오른 직후, 그는 또 한 번의 협상을 이끌었다. 이때 그가 청에 건의한 법안이 있다. 이른바 ‘파비에 법령’이다. 주요 내용은 선교사와 청의 지방 관리를 동급으로 두는 것이었다. 지역의 주교는 그 지역 총독과, 그 아래 보좌는 총독 바로 아래의 관리와, 일반 사제는 각 현의 책임자와 동급이 되었다. 천주교 관련 사안이 발생할 때, 동등한 교섭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한 조치였다. 청 조정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지방 행정에서 프랑스 정부의 간섭을 빗겨갈 수 있었다.

결과는 엉뚱했다. 선교사들이 마치 지방의 관리라도 된 양 행동했다. 특권의식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천주교의 옛 재산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주민과 크고 작은 마찰을 일으켰다. 신자가 연루된 송사에 개입하여 일방적으로 신자 편을 들기도 했다. 원성이 높아갔고, 그만큼 적대감도 커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선교사는 치외법권을 넘어 지방관과 동등했다. 서양을 몰아내자. 일단의 무리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구호는 점점 더 힘을 얻어갔고,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땅 잃은 무지렁이 촌부의 마음에도 내처 닿을 만했다. 그해 여름, 북당을 포위하고 살육한 이들은 누구였을까? ‘파비에 법령’에 분노한 이도 적잖이 있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입이 없던 사람들이었으니.

‘테 데움’(Te Deum). 오래된 라틴어 찬송가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첫머리가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다. 유명한 작곡가들의 여러 버전이 있다. 프랑스의 곡조였을 테니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 1643-1704)의 곡이었으리라. 들어 보시라. 1악장 첫머리 힘찬 트럼펫 연주로 시작된다. 의화단 무리를 쫓아낸 프랑스 군인들이 부른 승전가였다. 19세기와 20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본 태도와도 무관치 않았다.

테 데움, 전투가 끝난 자리에서

북당 전투에 승리한 이들은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소리 높여 기쁨의 찬가를 불렀다. ‘테 데움’(Te Deum). 오래된 라틴어 찬송가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프랑스의 곡조였을 테니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 1643-1704)의 곡이었으리라. 승전가로도 곧잘 불렀던 노래다. 그날, 프랑스 군인들은 힘차게 그 노래를 불렀다.

파비에 주교는 서둘러 무너진 건물을 보수했다. 북당은 경미한 손상에 그쳤지만 주교는 새로운 공사를 지시했다. 종탑을 더 올리는 공사였다. 이로써 북당은 잠지구 옛 성당의 높이를 회복했다. 청 조정의 허락 같은 건 없었다. 서태후는 서안(西安)으로 도피했고, 이홍장은 노쇠하여 이듬해 사망했다. 황성의 빈 하늘에서, 북당의 종탑은 늠름했다. 그해 겨울, 파비에는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Chevalier) 훈장을 받았다. 북당을 훌륭히 방어해낸 공로였다.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가장 명예로운 훈장이었다.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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