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어떤 계절을 지나가고 있는 걸까? 한동안 잠깐은 정말 겨울이구나 했는데, 그 뒤로 쭉 벌써 봄이 왔나 싶게 날이 푸근하다. 소한이 코앞에 있는데도 말이다. 글쎄 지난 주말에는 마을 뒷산 정상에 올랐는데 꿀벌 몇 마리가 날아다녀서 깜짝 놀랐다. 12월 말에 꿀벌이라니 이게 웬말인가. 추웠다 더웠다 기온이 오락가락하는 통에 꿀벌들도 어느 가락에 춤을 춰야 하는지 헷갈리는 모양이다.

헷갈리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원고 마감일이 있어야 겨우 원고를 쓰는 사람이라 그런가 동장군의 독촉이 없으니까 월동 준비를 자꾸 미루게 되는 것이다. 김장도 미루고 미루다가 친정 엄마 성화가 아니었으면 못할 뻔했고, 메주는 1월 초인 오늘에야 빚었다. 심지어 입동에 갈랐어야 하는 된장을 아직 가르지도 못하고 있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내 일상에 자연스러운 타임라인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계절의 혼란 속에 그것들이 마구 뒤엉켜버린 느낌이랄까?

겨울이 안 추우면 좋지 뭘 그러냐 할 수도 있겠지만 생명의 입장에서 볼 때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 그래야 쓸데없는 일에 기운을 빼앗기지 않고 다음 해 키워 낼 씨앗을 준비하는 데 집중할 수가 있다. 만약 겨울이 따뜻하고 습하기까지 하다면? 봄을 온도와 습도로 감지하는 씨앗은 기지개를 펼까 말까 싹을 틔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릴 수밖에 없다. 그러느라 깊이 잠들지 못하고 충분히 쉬지 못해서 제대로 봄을 맞이할 수가 없다.

그림책 "딸기밭의 꼬마 할머니"를 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책에는 요즘과 같은 이상기후 때문에 고생하는 딸기밭의 꼬마 할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할머니는 딸기밭 땅속에 살며 딸기 열매가 맺혔을 때 딸기를 빨갛게 색칠하는 일을 한다. 한마디로 땅속 요정이랄까? 그런데 한겨울에 날이 너무 따뜻해서 눈 대신 비만 오고, 할머니 이마에서는 땀이 날 지경이다. 할머니는 왠지 이상하다 싶어서 땅 위로 올라가 봤는데 딸기밭이 온통 파릇파릇한 잎으로 덮여 있다. 곧 있으면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릴 텐데 이를 어쩌나. 할머니 화들짝 놀라 물감 만들기 작업에 돌입한다. 물감을 만들려면 햇빛을 잔뜩 빨아들인 물이 필요한데, 나무 뿌리로부터 받아내는 물이 아직 얼마 모이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땅속 더 깊은 데까지 내려가 샘물을 퍼다 날라야 했다. 그런가 하면 물에 섞을 돌가루도 서둘러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밤낮없이 돌을 파내느라 할머니 손은 물집투성이가 된다. 다른 때 같았으면 햇빛물이 모일 동안 뜨개질로 소일하며 충분히 쉴 수 있었을 텐데, 돌을 파내는 일도 훨씬 여유 있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느닷없이 찾아온 봄 기운에 할머니는 허둥지둥 녹초가 될 때까지 일을 하고 그러느라 지쳐버릴 수밖에 없다. 물론 할머니는 씩씩하고 꿋꿋하게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다시 갑자기 날이 추워져서 눈이 펑펑 내리고 딸기밭은 금세 눈에 뒤덮여버린다. 할머니의 애씀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다행히 눈을 걷어내니 딸기들이 남아 있어 동물들은 맛있게 냠냠 겨울 딸기를 먹을 수 있었지만, 이상기후가 계속된다고 하면 아마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할머니는 지치다 못해 그냥 쓰러져버리지 않을까? 뒤죽박죽이 된 계절의 흐름은 할머니의 일상을 건강치 못한 방식으로 망가뜨릴 게 분명하고 딸기밭도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다.

우리 밭에도 평소와 다른 이상징후가 하나 있는데 쪽파가 얼지 않았다는 거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잎이 사그라들어 쪽파밭인지 아닌지조차 모르게 되었을 텐데, 아직까지 이파리가 살아있다. 갑자기 대파처럼 대범해져서 겨울 추위 따위 아무렇지 않은 걸까? 물론 아닐 거다. 이번 겨울의 추위가 너무 싱거워서 쪽파를 얼리지 못한 거겠지. 그 덕분에 파전 좋아하는 다울이는 한겨울에도 파전 해 달라며 쪽파를 뽑아오는데, 나는 겨울엔 김치전만 있어도 충분하니 쪽파가 겨울엔 ‘얼음!’ 하고 쉬었으면 좋겠다. 봄이 ‘땡!’ 하고 쳐줄 때까지.

ⓒ박다울

정청라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무관심, 무 호기심의 삭막한 땅을 
관심과 호기심의 정원으로 바꿔 보려 합니다.
아이들과 동물들의 은덕에 기대어서 말이죠.
무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명랑한 어른으로 자라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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