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전 처음 듣는 요상한 이름의 기념일들이 많기도 하다. 3월에만 해도 납세자의 날, 세계 여성의 날, 의용소방대의 날, 상공의 날이 있는데, 여성의 날은 얼굴을 아는 사이 정도의 친근함이 있지만 다른 날들은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다. 그런 내게 다나가 새로운 날의 이름을 물어다 주었다.

“엄마, 오늘은 작은 새들의 날인가 봐. 처음 보는 작은 새들이 정말 많이 보여. 어떤 새는 하늘을 날면서 소리를 내는데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 날개로 피아노 건반을 치는 것 같아.”

그러면서 새 소리를 흉내 내서 들려주는데 그 와중에 창밖에서 다나가 내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뿐 아니라 다른 여러 새의 소리도 가지각색 울림으로 따라 들어왔다. 새들은 내가 귀를 기울이기 전부터 부지런히 소리를 내고 있었을 텐데 그제서야 내 귀에 들려오는 것이리라. 뭐가 그렇게 좋은지 힘차고 명랑한 소리들....

비 내린 뒤에 모처럼 하늘이 맑고 밝아서 새들도 신이 났을까? 어쩌면 다나 말처럼 오늘이 정말 작은 새의 날이라, 자기들끼리 기념행사라도 열기로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오늘이 정말 특별하게 다가왔다. 하루 온종일 우리 집에 자주 찾아오는 붉은머리오목눈이와 딱새, 쇠딱따구리 같은 작은 새들에 더 많이 눈길이 머물기도 했다. 다른 때 같으면 보아도 본 것이 아닌 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는데 새롭게 건네받은 이름 하나가 나 하나만 보이는, 아니 나 하나만 보려 하는 세상에 작은 틈새 하나를 열어 준 셈이다.

그렇다면 날마다 새롭게 그날의 주인공을 설정하여 달력을 채워 보면 어떨까? 달력의 날짜 칸칸마다 이끼들의 날, 시냇물의 날, 봄나물의 날, 개구리의 날, 거미와 거미줄의 날과 같은 식으로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이다. 다 똑같을 필요 없이 그날의 느낌과 마주침이 이끄는 대로. 또 반드시 생물일 필요도 없다. 밥솥의 날, 이불과 베개의 날, 걸레의 날.... 그러고는 잠깐이라도 그 존재의 삶을 떠올리고 묵상하며 감사의 메시지를 보낸다면? 그럴 수 있다면 일상의 빛깔이 전혀 다른 차원의 색으로 물들지 않을까? 다른 존재들을 도구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존재와의 연결감으로 충만해지는 삶이 열리게 되지 않을까?

상상의 새 ©박다랑 그림
상상의 새 ©박다랑 그림

비슷한 맥락에서 태극권 사부님이 선물해 주신 시계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사부님은 원래 잉여를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분이다. 자신에게 필요치 않은 물건은 얼른 누군가에게 줘버린다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사부님께서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시계가 우리 집에 온 셈인데, 그게 그냥 시계가 아니었다. 자연의 소리가 담겨 있는 시계였다. 1시는 애매미, 2시는 쓰릅매미, 3시는 맹꽁이, 4시는 산개구리, 5시는 긴꼬리, 6시는 극동귀뚜라미, 7시는 흰배지빠귀.... 하는 식으로 각 시간마다 시간을 알려 주는 소리가 다 다르다.

난 처음에는 그 시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생태 휘광으로 포장한 기발한 상품쯤으로 생각했던 같다. 그런데 매시 정각이 되어 자연의 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멈칫, 하던 일에서 빠져나와 황홀함에 빠지는 경험이 일어났다. 혼자인 줄 알던 공간에 반가운 누군가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찾아올 때와 비슷한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드디어 우렁 각시와 대면하게 된 노총각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시간이 숲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같은 소리와 냄새를 입어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살아나는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지금의 나로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나 같은 경우엔 소리만 듣지 그게 누구의 소리이고 몇 시를 뜻하는지는 아직도 분별이 잘 안 된다. 소리를 듣는 그 순간에 시간에 대한 새로운 느낌과 각성이 일어나는 정도로만 시계를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나와 달리 아이들은 매 시간의 주인공들을 다 알고 있다. 동박새 소리가 들리면 즉각 “동박새네. 9시다”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때로는 “곧 있으면 산개구리 울 시간이다!” 하고 미리 알아맞히기도 한다. 나는 언제쯤에나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으려나?

아무튼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가지는 시간의 느낌이 전혀 다른 공간, 새로워진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시간에 생명을 불어넣자. 작은 상상력의 씨앗으로!

정청라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무관심, 무 호기심의 삭막한 땅을 
관심과 호기심의 정원으로 바꿔 보려 합니다.
아이들과 동물들의 은덕에 기대어서 말이죠.
무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명랑한 어른으로 자라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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