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는 어떻게 해서 이주민 사도직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물음은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다. 일단 이주민 사도직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함의가 매우 근대적이다. 오늘날 정의평화나 생태환경, 이주민, 영성과 같은 한국 가톨릭교회에 익숙한 사도직 분야들은 전문화와 분업화라는 근대적 사유가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된 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주라는 이름 자체는 꽤 오래된 연원을 갖지만 이주민들을 위한 사목 역시 기껏해야 그 역사가 1871년으로 소급할 수 있을 뿐이다. 독일에서 성 라파엘회가 설립되어 전 세계에 이주한 독일인들-처음에는 그것도 독일 식민지로 파견된 독일인을 위한 사목, 즉 교포 사목에 가까웠다-에 대한 영적 돌봄이 시작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이주민 사도직이라고 부르는 형태가 등장한 것이다. 즉 이주민 사도직은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 뿌리 혹은 연원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초대 교회 자체가 선교사들이 로마제국의 교통망을 따라 이주하면서 만들어 나간 이주 교회였고, 교회 구성원 역시 교회 공동체가 있는 도시의 다양한 출신지 신자들을 아우르는 것이기에 이주민 사도직의 뿌리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구약과 예수님의 행적 자체에도 이주민 사도직의 영성적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이주민 사도직의 성서적 원천, 그리고 문화적인 뿌리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낯선 이들이라고 모두 이방인인 것은 아니다

구약이라는 텍스트를 관통하는 주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 맺게 된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느님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동에 관한 서사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구약에서 제일 중요한 이슈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 즉 하느님이 선택하시고 그분과 상호적인 계약을 맺은 이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자아와 타자의 경계선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핏줄로만 구분되는 고착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신앙, 그리고 그 신앙의 순도로 구분되는 매우 유동적인 것이 된다. 바로 이 유동성이 환대와 배제 사이의 회색지대를 만든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몸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네카르)은 누구도 내 성전에 들어올 수 없다.”(에제키엘 44,9)

“너희 땅에서 이방인(게르)이 너희와 함께 머무를 경우, 그를 억압해서는 안된다.”(레위기 19,33)

구약에서 타자는 대체로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앞서 인용한 에제키엘과 레위기는 각각 이방인에 대한 다른 태도를 보여 준다. 에제키엘에서 이방인은 성전에 들어올 수 없는 배제 대상으로, 레위기에서는 억압이 아닌 돌봄과 환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말로는 똑같은 이방인이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의 스펙트럼은 정말 넓다. 게르(어원은 외국인으로 살다), 토샤브(어원은 앉다, 거주하다), 노크리 혹은 네카르(어원은 외국, 이방) 등 다양하다. 그런데 어떤 단어들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방인 혹은 이스라엘 민족의 타자는 배제 대상이 되기도 하고 환대 대상이 되기도 한다. 굳이 구분하면 ‘게르’라는 단어는 포용과 융합의 대상이 될 때에 쓰고, ‘노크리’나 ‘네카르’는 이스라엘 민족의 안티테제이며 그렇기에 배제 대상이 된다. 이스라엘에서 이방인 개념의 양극을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준수하려는 생각을 가진 모든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로 구분한다. 물론 전자는 게르이고 후자는 노크리 혹은 네카르다.

재미있는 것은 노크리조차도 환대와 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 인물이 룻이다. 룻은 모압 여인이자 과부이지만 보아스의 환대와 호의를 받고 예수님의 조상이 된다. 룻은 보아스와의 첫 만남에서 자신을 노크리라고 부른다. 즉 구약의 이방인에 대한 태도를 게르나 노크리와 같은 단어에 따라 기계적으로 재단하면 매우 곤란한 셈이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성삼위 이콘.&nbsp;<br>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성삼위 이콘. 

좀 더 넓은 컨텍스트: 테오크세니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필레몬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 인물이 등장하는 맥락은 이렇다. 어느 날 제우스가 인간들의 환대를 시험하기 위해 아들 헤르메스와 함께 거지로 변장하고 사람들을 방문하였다. 사람들은 거지의 모습인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문전박대하였지만 가난한 필레몬과 그 아내 바우키스는 없는 살림에 성심껏 거지 몰골의 두 신을 환대하였다. 결론은 아마 누구나 쉽게 예상할 것이다. 박정한 마을사람들은 마을이 물바다가 되면서 모두 죽어버리고 필레몬 부부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가 되어 여생을 보낸다.

그리스 문화에서는 환대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어로 ‘크세니아’라고 불리는 환대의 어원은 이방인(크세노스)에서 나온 단어로, 일단 이방인을 환대하면 주인은 이방인을 보호할 의무가 생긴다. 반면 이방인 역시 환대를 받은 이상 주인에게 절대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그리스적인 환대의 의미다. 그리고 이 환대의 주신(主神)이 바로 제우스(이럴 경우 ‘제우스 크세오스’라고 표현)다. 그렇기에 그리스 문화에서 환대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며 매우 구속력이 큰 금기다. 이 금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환대를 시험하기 위해 이방인이 된 신들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테오크세니아가 그것이다. 테오크세니아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방인 혹은 나그네로 나타난 신이라는 뜻이다. 이런 뉘앙스의 서사가 창세기에도 나온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느님이 보낸 천사들이 나그네 세 명으로 등장하여 아브라함의 환대를 받는 장면은 테오크세니아의 정신을 정확하게 보여 준다.

나그네와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환대와 포용이라는 단어와 만나는 이러한 문화 정서 혹은 가치는 그런 점에서 구약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중해 문화, 특히 그리스 문화의 특징이라고 봐야할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 가치는 그대로 복음에도 이어진다. 그 단적인 예가 마태오 복음 25장 31-46절의 비유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냐?"는 물음 앞에서 ‘내가 나그네(크세노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는 예수님의 비유. 아마 마태오 복음 공동체의 복음 편찬자들이 나그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를 고르려고 했을 때 크세노스라는 단어를 너무나도 편안하게 고를 수 있었을 것이다.

성서적인 원천이 역사적으로 그대로 전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에서 이주민에 대한 돌봄을 이야기할 때 성경 속에 들어 있는 이방인과 외국인에 대한 환대의 서사들은 매우 호소력 있는 문화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주민 사도직의 역사적 원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김민 신부(사도 요한)

예수회 한국관구, 예수회 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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